오피니언 취재일기

‘졸속·늑장’ 예산안 처리 … 상시 예결위가 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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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면 국회 출입기자들은 ‘데자뷔(deja vu·旣視感)’에 시달린다. “단독 강행 처리하겠다”고 위협하는 여당, “몸으로라도 막겠다”고 외치는 야당, 본회의 직권상정을 고민하는 국회의장, 그러는 사이 모두 늘 그랬다는 듯 그저 지나쳐버리는 법정 처리 시한 12월 2일. 예산안 처리를 둘러싼 똑같은 풍경들이 해마다 12월이면 국회에서 되풀이되는 탓이다.

안타까운 건 이런 악순환의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 그중에서도 서민에게 더 많이 돌아간다는 점이다. 우선 꼼꼼하게 따져보지 못한 채 막판 1~2주일에 졸속 처리된 예산이 제대로일 리 없다. 꼭 필요한 예산이 깎이기 일쑤고,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 불요불급한 예산은 의원들의 감시의 눈길을 피해 슬며시 국회 문턱을 넘는다. 게다가 늑장 예산안 처리는 연말연시 경기도 얼어붙게 한다. 국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돼도 실제 지방예산이 확정되고 서민경제에까지 돈이 돌기 위해선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필요해서다.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우리 이웃들의 겨울이 예산안 처리 지연으로 더 추워지기도 한다.

그럼 ‘졸속’과 ‘늑장’, 두 단어로 요약되는 예산안 처리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 본지는 미국의 예산안 처리 절차와 제도를 살펴보는 기획기사를 보도했다. <본지 12월 8일자 3면> 비슷한 시행착오를 우리보다 한발 앞서 겪어냈기 때문이다.

일단 미국 연방정부는 예산안(‘대통령의 예산안’) 제안서를 매년 1월 의회에 제출한다. 그러면 상·하원 예산위는 2월부터 청문회를 열고 의회 예산처로부터 검토 보고서도 받아 4월 15일까지 예산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 결의안은 예산 총액과 분야별 세출액의 한도를 정해놓은 것으로, 다음 해 살림살이의 ‘큰 틀’인 셈이다.

이렇게 예산위에서 틀을 마련해 주면 상·하원 상임위와 세출위에선 5~9월까지 5개월간 예산을 심의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미국 상원이 법안화한 예산안을 처리하는 시한이 10월 1일. 결국 1월부터 9월까지 무려 8개월여의 대장정을 거쳐 국회에서 예산안이 처리되는 것이다. 사실상 상시 예산위 체제다. 1 ~2주일 만에 뚝딱 해치우는 우리의 예산 심의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한국 예산안 처리 제도의 문제점을 취재하며 만난 전문가들은 “한국도 미국처럼 상시 예결위 체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야 국회가 예산안을 두 달여 만에 얼렁뚱땅 통과시키는 졸속·부실 심의가 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예산 처리 시한을 놓고 여야가 몸싸움을 벌이며 대치하는 구태도 바로잡을 수 있다. 하나가 더 있다. 예산은 국민의 피와 땀이 어린 혈세다. 세금이 쓰일 곳에 쓰이는지 제대로 감시하려면 정부가 독단적으로 예산안을 짠 뒤 10월 2일에야 국회에 제출하도록 규정한 헌법도 손질해야 한다. 18대 국회에서 개헌이 논의돼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남궁욱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