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사상脫北>외국의 망명사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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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황장엽(黃長燁)북한 노동당비서처럼 제3국의 적성국 외교공관에망명을 신청한 사례는 숱하게 많다.
50년대이후 미.소 냉전때 소련 인사들의 서방 망명은 거의 이렇게 시도됐고 또 이뤄졌다.그러므로 국제법상 黃의 망명에 별다른 문제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이같은 망명의 성사여부는 정치적 고려에크게 좌지우지된다.반드시 허가된다는 보장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옛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이다.그는 지난 91년 모스크바 주재 칠레대사관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으나외면당해 끝내 동독으로 돌아와 재판에 회부됐다.
黃비서가 망명을 감행한 중국의 경우는 비교적 복잡하다.중국은망명에 대해 매우 신중해 가급적 망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제3국의 적성국 외교공관 망명은 아니지만 중국의 반체제 물리학자인 팡리즈(方勵之)의 망명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方은지난 89년 천안문사태이후 베이징(北京)미 대사관에 피신한뒤 1년이 지난후에야 출국할 수 있었다.중국측이 완 강히 반대했으나 결국 方의 망명을 막지 못한 것은 국제관례 때문이다.중국에서는 또 지난 90년 당시 홍콩주재 신화사(新華社)사장이었던 거물급 정치인 쉬자툰(許家屯)이 미국에 망명함으로써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67년3월 요시프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의 미국 망명은 黃의망명신청과 닮은 구석이 있다.미.소간 냉전이 한창이었는데다 망명지가 비동맹권인 인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인도를 극비리에 여행중이던 스베틀라나는 모스크바로 돌아오기 직전 뉴델리주재 미 대사관에 불쑥 나타나 망명의 문을 두드렸다. “나는 스탈린의 딸입니다.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요청합니다.” 당시 그녀의 망명 타진은 동서로 양분된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미.소간에 외교전쟁이 붙은 것도 물론이다.소련의 첫 반응은 간단했다.“미중앙정보국(CIA)에 납치됐다”는 것이다. 북한이 黃의 망명에 대해 보인 첫 반응 그대로다.소련은 이후 망명이 자의에 따른 것이 명백해지자 그녀를 CIA로부터 돈을 받고 몸을 판 배은망덕한 여자라고 매도했다.
최근 들어서는 93년12월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의장의 딸 알리나 레부엘타가 스페인에서 미국 망명에 성공했다.
외교공관에서의 망명사건중 가장 오래 끈것 가운데 하나가 지난48년 페루 혁명에 실패한 인민혁명당 지도자 아야 데 라 토레사건.토레는 당시 페루주재 콜롬비아대사관에 피난했으나 페루 정부가 토레를 기소,외교마찰을 빚다가 8년만인 56년 국외로 추방됐다. 〈오영환.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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