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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영화 "초록물고기"를 보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여기에 몇마리의 초록빛 물고기가 있다.
미애가 미음을 추스릴 수 없을 때마다 올라타는 비둘기호 기차.탈주를 꿈꾸는 그녀와 과거를 지향하는 막동이 만나는 자리.그곳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객실 의자를 감싸고 있는 낡고 닳아빠진 녹색 시트처럼 우울한 느낌이 진하게 고여있을 뿐이다.
막동의 지갑안에 소중하게 꽂혀있는 오래된 사진 속의 버드나무.하늘을 나는 물고기마냥 푸른 잎과 줄기를 늘어뜨린채 부드럽게흐느적대면서 화목했던 예전의 세월을 상징하는 유순한 나무.막동은 그 시절의 한때를 한없이 그리워하지만,그 나 무를 둘러싸고비로소 온 가족이 모여 녹색 기왓장을 머리에 얹은 큰나무집 식당을 세웠을때 막동은 그곳에 없었다.
이창동 감독의 아름다운 데뷔작.초록물고기'는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 연어의,그러나 회귀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쓸쓸한 보고서다.언제나 그렇듯 한번 우리 곁을 스쳐간 시간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돌아갈 수 없는 길을슬퍼하고 또 회억한다는 점에서 미애와 막동은 닮아있다.반사광 때문이었을까.나는 미애가 어느 장면에선가 입고 있던 잿빛 코트를 얼핏 발광하는 은녹색으로 보았다.버드나무 풍경이 있는 사진을 막동에게서 건네받아 자기 가방안 에 넣고 다니는 그녀는 그러니까 밤의 물고기인 셈이다.
부단히 존재의 지느러미를 흔들어대지만 끝내 궤도 위를 벗어날수 없는 이들을 감독은,아카시아를 포함한 땅위의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고는 어느날 느닷없이 솟아오른 신도시 일산,그리고 부패와 타락,열패감과 증오가 뒤섞인 혼돈의 공간 영등포와 중첩시킨다. 번듯하고 화려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이 불모지대에 일그러진 가족이 있다.개발정책에 밀려난 원주민(언제부턴지 모르게 우리에게 원시적인 상실감을 전달하는 이 말)인 막동네 가족은 큰 형을 제외하고 같이 산다.모여살기는 하나 흩어져 사 는 것과 다름없이 그들은 서로에게서 멀어져 있다.다른 형제가 하는 일도,절망도,꿈도 알지 못한다.
정착할 곳을 잃은 막동은 그래서 잠시 머뭇거린다.제대하던 날좌우 표시가 똑같이 돼있는 지하도 출구앞에서 그랬던 것처럼.그리곤 곧 붉은 스카프를 따라간다.그 길끝에 피보다 진한 의리를내세우는 배태곤이 있다.그가.형님'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을 위해 소중한 것까지 버리는 비열한.양아치'에 불과하고 그의 조직이 뿌리없는 가족의 극명한 형태임을 깨닫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초겨울,우리는 물고기같이 싱싱한 스물여섯 청춘이 라이터 불빛과 함께 꺼지는 광경을 목격한다.잠결에도 엄마를 부르는 막내가재개발지구의 한 건물안에서 폐허처럼 맞이한 죽음,낯익은 한국 근대가족사의 비극이다.
〈영화평론가〉 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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