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1590년 조선통신사 vs 2008년 방미의원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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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소설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이다. 임진왜란에 휩싸인 조선의 암울한 현실이 응축돼 있다.

버려질 섬이 예측될 순 없었을까. 조선 왕 선조는 전쟁 발발 2년 전인 1590년 ‘조선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을 일본에 보냈다. 그러나 두 신하는 귀국해 정반대의 보고를 올렸다. 서인(西人) 황윤길은 “왜가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 말했다. 동인(東人) 김성일은 “쳐들어 올 낌새가 없다”고 했다. 당쟁에 시달리던 선조는 전쟁 가능성을 묵살했다. 결국 전쟁은 터졌고, 조선 반도는 버려졌다. 2008년 11월의 대한민국은 400여 년 전 조선과 닮았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휩싸인 오늘, 대한민국은 세계를 상대로 ‘자유무역’ 전쟁을 준비 중이다. 가장 덩치 큰 것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다. 400여 년 전 선조가 그랬듯 대한민국 국회는 지난 17일 4명의 여야 의원들로 꾸려진 방미단을 미국에 보냈다. FTA 비준을 앞둔 미국 내 기류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여야 의원들은 엇갈린 이야기를 풀어놨다. 미국의 정·관계 인사 30여 명을 함께 만났지만 소속 정당에 유리한 해석만 내놓았다. 한나라당 황진하 의원은 주장했다. “우리 국회가 먼저 FTA를 비준하면 미국도 움직일 분위기였다.” 민주당 문학진 의원은 달리 말했다. “미국은 한·미 FTA에 관심이 없더라. 재협상을 준비해야 한다.” 방미 전 선(先)비준론을 놓고 맞섰던 양당이 미국을 다녀와서도 같은 주장만 되풀이한 셈이다.

방미단은 하루 평균 8~10명의 미국 정계 인사를 만났다. 그런데 한나라당은 “한국이 먼저 비준하면 미국에도 도움이 되겠느냐”는 질문을 집중적으로 던졌고 민주당은 “재협상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집중했다고 한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은 “양당 모두 유리한 대답을 얻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방미단은 출국 전부터 선비준 논란으로 혼선을 빚었다. 그래서 미국 측 인사들과의 약속이 헝클어져 면담 시간이 불충분했다는 자평이 나온다. 한 의원은 “정권 인수팀 핵심 관계자는 한 명도 접촉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국회가 나서는 모습은 정당하다. 그러나 준비 없이 당파 이익만을 노린 의원 외교는 여론의 혼선만을 부추길 수 있다. 우리에겐 더 이상 400년 전 황윤길과 김성일의 논쟁은 필요치 않다. ‘자유무역’이란 파고를 앞둔 대한민국이 ‘버려진 섬’이 될 순 없지 않은가.

정강현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