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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도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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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97년 11월 20일. 마닐라발 김포행 비행기에서 낯선 30대 후반의 미국인이 내렸다. 그는 곧바로 신임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마주 앉았다. 그는 매우 점잖았다. 그러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메시지만 반복했다. 조용한 목소리였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이란 합의를 번복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임 부총리는 반나절 만인 밤 10시20분 백기투항했다. 그 젊은 신사가 바로 티머시 가이스너 미 재무장관 내정자다. 이듬해 그는 일본 대장성의 손목을 비틀어 엔화 강세까지 꺾어놓았다.

월가에서 가이스너는 ‘어둠의 도살자’로 불린다.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였던 지난 3월 그는 직접 베어스턴스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48시간 내에 회사를 JP 모건에 넘기라.” 이 한마디로 끝이었다. 9월 13일 저녁에도 그는 손에 피를 묻혔다. 자신의 사무실로 월가의 최고 경영자 30명을 호출해 이렇게 통보했다. “리먼 브러더스는 파산시킨다. 더 이상의 구제금융은 없다.” 가이스너는 맞은편을 노려보았다. 사색이 된 메릴린치의 존 테인 회장은 그 자리에서 회사를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넘겼다.

지난달 13일에는 미 재무부로 주요 9개 은행장이 소환됐다. 그들은 “일부 은행 지분을 정부에 넘기라”는 요구에 기겁했다.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여기서 못 나간다.” 가이스너는 협박과 함께 구체적인 숫자를 불러주었다. “BOA·JP 모건·씨티에는 각 250억 달러, 웰스파고에는 200억 달러….” 거액의 지원금에 CEO들의 표정이 풀렸다. 미국 은행의 부분 국유화가 결정된 것이다.

역대 미 재무부는 루빈, 서머스, 립튼 같은 하버드대 출신이 휩쓸었다. 가이스너는 그런 학연과 인맥은 없다. 그런데도 클린턴 정부와 부시 정부를 오가며 승승장구했다. 모나지 않은 처신에다 조용함 속에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그 비결이다. 그는 위기 때마다 악역을 맡았지만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는다. 재무장관 내정 소식에 예전에 호되게 당한 한국과 일본에서 더 큰 환호성이 들릴 정도다. 아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사석에서 중국어·일본어로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아는 사람에게 당할수록 훨씬 아픈 법이다. 부드러운 가이스너의 얼굴 뒤엔 심판자의 냉혹한 본능이 숨어 있다. 앞으로 더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