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에서 가이스너는 ‘어둠의 도살자’로 불린다.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였던 지난 3월 그는 직접 베어스턴스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48시간 내에 회사를 JP 모건에 넘기라.” 이 한마디로 끝이었다. 9월 13일 저녁에도 그는 손에 피를 묻혔다. 자신의 사무실로 월가의 최고 경영자 30명을 호출해 이렇게 통보했다. “리먼 브러더스는 파산시킨다. 더 이상의 구제금융은 없다.” 가이스너는 맞은편을 노려보았다. 사색이 된 메릴린치의 존 테인 회장은 그 자리에서 회사를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넘겼다.
지난달 13일에는 미 재무부로 주요 9개 은행장이 소환됐다. 그들은 “일부 은행 지분을 정부에 넘기라”는 요구에 기겁했다.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여기서 못 나간다.” 가이스너는 협박과 함께 구체적인 숫자를 불러주었다. “BOA·JP 모건·씨티에는 각 250억 달러, 웰스파고에는 200억 달러….” 거액의 지원금에 CEO들의 표정이 풀렸다. 미국 은행의 부분 국유화가 결정된 것이다.
역대 미 재무부는 루빈, 서머스, 립튼 같은 하버드대 출신이 휩쓸었다. 가이스너는 그런 학연과 인맥은 없다. 그런데도 클린턴 정부와 부시 정부를 오가며 승승장구했다. 모나지 않은 처신에다 조용함 속에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그 비결이다. 그는 위기 때마다 악역을 맡았지만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는다. 재무장관 내정 소식에 예전에 호되게 당한 한국과 일본에서 더 큰 환호성이 들릴 정도다. 아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사석에서 중국어·일본어로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아는 사람에게 당할수록 훨씬 아픈 법이다. 부드러운 가이스너의 얼굴 뒤엔 심판자의 냉혹한 본능이 숨어 있다. 앞으로 더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