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중소기업에 돈 풀게 하려면 지점장 ‘문책’보다 인센티브 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은행이 돈을 풀지 않으면 멀쩡한 기업까지 넘어지고, 나라 전체론 더 많은 돈이 들어간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 톡톡히 경험한 사실이다. 대통령이 다그쳐도 은행 창구가 풀리지 않는 것은 막상 부실이 나면 담당자들이 책임을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돈이 풀리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업은행이 최근 마련한 중소기업 대출 소프트웨어는 그런 점에서 참고가 된다. 물론 기업은행은 정부가 뒤를 받치고 있는 국책은행이라 시중은행과는 입장이 좀 다르다.

◆실적 ‘포인트’ 적립=기업은행 서울 구로동 정연흥 기업금융지점장은 요즘 부쩍 바빠졌다. 돈을 빌리려는 우량기업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예년의 경우 11~12월은 ‘휴지기’였다. 정 지점장은 “예년 같으면 지점장들이 대개 11월이면 연간 목표를 달성한다”며 “남은 한두 달은 새로 일을 벌이기보다 실적 관리에 힘을 쏟는다”고 말했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지점장들은 이듬해 2월 연간 목표를 새로 배정받는다. 전년도 실적에 약 20% 정도를 추가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올해 목표를 다 채웠다면 11~12월에 열심히 하는 것이 득될 게 없다.


기업은행은 목표 배정을 앞당기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했다. 우선 일선 지점장의 목표 설정을 12월 초까지 마치기로 했다. 또 11~12월 실적은 내년 실적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예컨대 올해 목표인 1000억원 대출을 달성한 지점장에게 1200억원의 목표치를 미리 주고, 다음 달에 200억원을 더 대출할 경우 내년 실적에 반영하는 것이다.

◆면책=인천 남동공단의 우량 자동차 부품업체인 D사는 최근 돈 걱정을 덜었다. 기업은행에서 100억원의 신용한도를 받아놨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100억원까지 꺼내 쓸 수 있다. 기업은행의 ‘사전여신한도제’ 덕분이다. 이는 기업이 은행에서 자금을 빌려 쓸 수 있는 ‘크레디트라인(신용한도)’을 미리 설정해두는 것이다. 기업용 마이너스 통장인 셈이다.

해당 지점장이 신청하면, 본점이 일주일 내 한도를 정해준다. 선정된 기업이 자금을 요청하면 지점은 곧바로 돈을 내준다. 기업은행은 시행 열흘 만에 14개 업체에 1000여억원의 신용한도를 설정했다. 여기서 핵심은 ‘면책’이다. 사전여신한도제에 의해 나가는 대출은 나중에 부실화돼도 지점장이나 관련 직원을 일절 문책하지 않는다.

◆“실적보다 열정”=24일부터 기업 평가모델도 바꿨다. 외환위기 이후 11년 만이다. 재무제표 같은 숫자보다 최고경영자(CEO)의 열정이나 비전 등에 대한 상대가중치를 더 높인 게 특징이다. 재무제표는 과거 실적이 담긴 것이어서 향후 전망이나 기업 잠재력을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 특히 요즘 같은 불황기엔 재무제표들이 일제히 나빠지게 돼 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당장은 돈에 쪼들려도 CEO와 전 종업원이 똘똘 뭉쳐 불황과 치열하게 맞서고 있는 기업엔 새 평가모형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용등급 하향 유보=기업별 금리와 대출액을 결정하는 건 신용등급이다. 등급은 매출액이나 수익성이 좌우한다. 이런 방식은 평상시엔 괜찮지만 불황기엔 자칫 기업의 자금난을 키우는 악순환을 부를 수 있다.

기업은행은 등급 하향을 한시적으로 보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윤용로 행장은 “키코 피해나 환차손, 일시적 유동성 문제로 실적이 부진해진 기업에 대해선 등급 하향을 보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등급 규정은 은행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자칫 은행 건전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금융감독원이 엄격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기업은행은 현재 금감원과 협의 중이다.

이상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