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宗은 합방 거부한 개혁군주" 학계,재평가 작업 활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고종(高宗)은 과연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군주였나.지금까지 고종은 방송 사극(史劇)이나 역사책을 통해 근대적 개혁과 자주적 국권 확립에 무능했던 망국의 군주로 비춰져 왔다. 그러나 대한제국(大韓帝國) 수립 1백주년(10월12일)을 앞두고 최근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정책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다.70년대 중반 강만길(고려대)·신용하(서울대)교수간에‘대한제국 성격논쟁’이 있은 후 20년만의 일이다. 이들 연구는 고종의 무능과 가중된 민중수탈로 ‘한일합방’이 당연한 귀결이었다는 일제의 ‘악선전’을 극복하고 민족 내부의 주체적 근대화 노력을 해명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최근 ‘한국 근대도시 구성의 시발’등 3편의 논문으로 활발한 고종 재평가 작업을 선도해온 이태진(李泰鎭·서울대)교수는 “일제의 의도적인 왜곡 속에서 고종에 대한 인상은 왕비와 대원군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우유부단한 군주로 그려져 있다”고 비판하고 나라의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 여러가지 근대화사업을 벌인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개화주의자”로서 고종을 새롭게 평가한다. 고종이 을사조약의 비준을 거부하고 계속 외교권 회복을 시도하다 강제로 왕위에서 쫓겨난 것도 재평가의 근거다.최근 ‘1900년대 초 일본과 맺은 조약들은 유효한가’란 논문에서 이상찬 규장각 학예연구사는 “고종의 부정부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폐위시켰다”는 일제의 주장을 반박하고 고종은 일제의 강제조약에 서명하기를 끝까지 거부했다는 점을 밝혔다.

고종이 주도한 대한제국의 개혁정책에 대한 재평가 작업도 구체화되고 있다.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토지조사(量案)사업·철도부설·광산개발·화폐개혁등 근대적 개혁을 자주적으로 추진했다.고종의 시도는 추진주체들의 한계와 열강의 압력에 밀려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양상현 규장각 학예연구사는 올해 통과된 박사학위 논문 ‘대한제국기 내장원(內藏院)의 재정(財政)관리연구’에서 “대한제국의 재정확대가 민중에 대한 무조건식의 수탈이 아니라 외세의 경제적 침탈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역할도 했다”고 밝혔다.

한국역사연구회(회장 박종기)는 오는 10월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 평가’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을 준비하고 있다.

<정창현 현대사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