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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피해자 안 나오도록 무죄 입증에도 과학수사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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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남부지법 판사 21명이 17일 서울 신월동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찾았다. 판사들이 국과수를 공식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한면수 국과수 유전자분석과장은 판사들에게 ‘형사사건에서 DNA 분석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한 과장이 사례로 든 것은 ‘지난해 6월 울산에서 일어난 연쇄 강도·강간 사건’이었다.

당시 사건 현장 주변에서 강도를 하던 L씨(21)가 붙잡혔다. L씨는 본드를 흡입했다고 진술했다. 피해자들이 ‘범인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범인에게서 LPG 가스 냄새가 났다’고 설명한 것과 정황이 유사했다. 수사기관은 여죄를 추궁한 끝에 L씨를 출장마사지사 등 여러 강도·강간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했다.

L씨는 1심과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법원이 피해자의 속옷에서 채취한 정액이 L씨의 유전자와 다르다는 국과수 감정 결과에 주목하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대법원은 ‘DNA 분석을 통한 유전자 검사 결과의 증명력’을 인정해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과학수사가 재판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준 사례였다.

남부지법 판사들의 국과수 방문은 ‘같은 지역에 위치한 두 기관이 서로 협력하자’며 세운 상호 방문 계획의 일환이다. 앞서 지난달 23일에는 국과수 직원들이 법원을 방문했었다.

법원은 그동안 ‘공판중심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고민해 왔다. 검찰 등 수사기관이 작성한 조서를 바탕으로 재판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법원 스스로 실증적으로 사건에 접근해 진실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필수조건이 ‘과학수사의 확립’이었다.

윤성근 수석부장판사는 “유죄만 입증해 범인을 결정하는 지금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죄를 입증하는 과정도 함께 이뤄져야 입체적으로 사건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일단 범인이 지목되면 수사기관은 적극적으로 유죄 여부를 파악한다. ‘범행을 저질렀다’는 증거만 찾는 것이다. 그러나 ‘울산 출장마사지사 사건’처럼 이런 수사 관행은 엉뚱한 피해자를 낳을 수 있다.

윤 부장판사는 미국의 ‘이노센스 프로젝트’를 예로 들었다. 미국의 비영리기관이 DNA 분석 등 과학적 증거를 동원해 유죄 판결이 난 피의자를 적극적으로 구제해 주는 제도다. 윤 부장판사는 “판사들이 증거 제출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그것을 통해 사건을 원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판사들이 나서서 ‘한국판 이노센스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인석 남부지법 공보판사는 “DNA 분석을 통해 무죄가 입증된 국내 대법원 판례는 ‘울산 출장마사지 사건’을 포함해 두 건뿐”이라며 국내에는 ‘무죄 입증 시스템’이 아직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진주 기자

◆이노센스 프로젝트(The Innocence Project)=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을 과학적 증거로 구제하는 프로젝트. 미국의 비영리기구 ‘이노센스 프로젝트’ 홈페이지(innocenceproject.org)에 따르면 1992년부터 지금까지 223명의 무죄를 입증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뒤 무죄로 밝혀진 사례도 17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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