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83>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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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호 16면

1988년 월드시리즈. LA 다저스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맞대결이었다. 토미 라소다 감독이 이끄는 다저스는 오럴 허샤이저라는 걸출한 에이스가 있었지만 강타자 호세 칸세코가 버틴 애슬레틱스에 절대 열세였다. 특히 장타력을 지닌 주포 커크 깁슨이 허벅지 부상으로 벤치로 물러났다는 게 약점이었다.

무승부 사라진 포스트 시즌, 끝장 승부는 아름답다

홈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다저스는 초반 2-0의 리드를 잡았지만 칸세코에게 만루홈런을 얻어맞고 끌려갔다. 다저스가 1점을 따라붙어 4-3. 그렇게 9회 말이 찾아왔다. 애슬레틱스의 마무리 데니스 에커슬리가 아웃카운트 2개를 잡아내고 누상에 주자가 없었다. 중계 카메라는 벤치의 깁슨을 자꾸 비쳤다. 한 방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그때 라소다 감독은 대타로 깁슨이 아닌 마이크 데이비스를 기용했다. 데이비스는 볼넷을 골랐고 카메라는 다시 깁슨을 잡았다.

라소다 감독이 또 한 번 타임을 불렀다. 대타 깁슨. 깁슨은 방망이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다리를 절룩거리고 타석에 섰다. 에커슬리는 왼손타자 깁슨의 바깥쪽을 계속 공략했다. 풀카운트의 승부가 이어졌고 마지막 순간 거짓말 같은 역전 끝내기 홈런이 터졌다. 절룩거리며 베이스를 도는 깁슨의 모습과 벤치를 박차고 뛰어나와 두 팔을 번쩍 치켜든 라소다 감독. 다저스타디움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1차전을 월드시리즈 최고의 명승부로 장식한 다저스는 기세를 몰아 4승1패로 애슬레틱스를 무너뜨렸다. 20년 전 깁슨의 홈런은 역대 월드시리즈 최고의 홈런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경기를 AFKN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그런데 중계방송을 보면서 내내 궁금했다. 왜 라소다 감독은 1점을 뒤진 9회 말 2사 후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한 방을 가진 깁슨을 대타로 기용하지 않았을까. 그는 왜 데이비스를 기용한 뒤 동점 주자가 출루한 뒤에야 깁슨을 대타로 썼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나 라소다 감독이 몸담은 다저스에서 인턴십을 했다. 그때 라소다 감독에게 물었다. 왜 그랬느냐고.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딱 한마디였다.

“야구를 비기려고 하나? 야구는 이기려고 하는 게임이다.” 그는 대답과 함께 껄껄 웃으며 알 듯 모를 듯한 여운을 남겼다. 그 순간 머리가 번개를 맞은 듯 ‘번쩍!’ 하고 깨었다. 야구를 통해 추구하는 절대가치가 ‘승리’라는 걸 문득 잊고 있었던 거였다. 주자 없는 상황에서 대타 깁슨을 기용하는 건 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 전략이라는 게 라소다 감독 대답의 핵심이었다.

그렇다. 야구는, 프로야구는 이기려고 하는 게임이다.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게임이 아니다. 그래서 올해 프로야구가 진행한 무제한 연장 승부, 끝장 승부는 프로야구 본래의 취지를 잘 살리는 정책이었다. 시즌 도중 끝장 승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을 때 ‘네이버’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끝장 승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응답자 2만8468명 가운데 2만661명으로 72.6%였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현실적으로 무리이기 때문에 무승부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는 의견은 6158명, 21.6%에 그쳤다. 무엇보다 연장에 접어들고 나서 지지 않으려고 질질 끄는 소극적 플레이가 사라졌다는 게 어딘가. 이기든 지든 승부를 거는 화끈한 플레이가 살아났다는 건 프로야구의 또 다른 매력이다.

그 반가운 끝장 승부, 그 매력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깁슨의 홈런과 같은 명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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