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북카페] 쉰 고구마도 뭉클한 시가 되는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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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와락
정끝별 지음, 창비, 143쪽, 7000원

찐 고구마를 덥석 베어 물자 왈칵 밀려드는 쉰내.

“작은 구멍들이 숭숭/고구마를 찔 때/익었나 안 익었나 푹푹 찔러봤던 구멍들이다/구멍마다 맺힌 이슬이 쉰내의 근원이렷다(…) 의심이 제일 먼저 상하게 한다/찔린 구멍마다 차올랐던 복수가/뱃속에 차오른다” (‘감염의 경로’ 중)

젓가락 구멍에서 시 한 수 나올 줄 누가 알았을까. 올해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받은 정끝별(44) 시인이 일상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를 담아 네 번째 시집을 냈다.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을 표절할래”(‘불멸의 표절’ 중)

그에게 시를 짓는 것은 자연의 섬세한 변화와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표절’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시인의 ‘표절 능력’은 이 시집에서 충실히 발휘된다. 저녁 상차림에 올랐다 버려진 생선이 준 깨달음부터(‘순식간’) 시각장애를 가진 아비와 정신지체를 가진 아들이 주는 뭉클함(‘걷는다’), 설렁탕집에서 합석한 남녀가 스쳐 지나가는 짧은 순간이 남긴 로맨스의 여운(‘설렁탕과 로맨스’)까지 그러모았다.

“오, 살랑대는 추파(秋波)/춥스! 이제 곧 앙상한 겨울 막대만 남을 텐데/가까스로 가을인데”(‘추파,춥스’ 중)

시인은 막대사탕 추파춥스를 빨며 앙상한 겨울 나무를, 밀려오는 가을(추파)을 불러온다. ‘꾸꾸루꾸꾸’ ‘도랑도랑’ ‘왈칵’ 등 부사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정끝별식 말놀이도 눈에 띈다.

“반 평도 채 못 되는 네 살갗/차라리 빨려 들고만 싶던/막막한 나락//영혼에 푸른 불꽃을 불어넣던/불후의 입술/천번을 내리치던 이 생의 벼락//헐거워지는 너의 팔 안에서/너로 가득 찬 나는 텅 빈,//허공을 키질하는/바야흐로 바람 한 자락”

나락, 벼락, 자락으로 각운을 맞추며 사랑을 나누는 순간을 표현한 이 시의 제목은 ‘와락’이다. 와락, 누군가에게 안겨본 사람은 안다. 그 순간을 말하기에 ‘안는다’는 싱거운 표현 보다는 ‘와락’이란 부사가 제격이라는 것을.

임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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