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나는美기업들>1.기업도 상품 原價부터 파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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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5년 내리 호황을 구가하는 미국경제.미국 언론들마저.미국 경제의 르네상스'라며 자화자찬이다.80년대 중반 이후 일본 기업들에 온갖 수모를 당해온 미국 기업들이 이처럼 기(氣)를 되살릴줄은 아무도 몰랐었다.미국기업들의 이같은 거듭나 기 배경에는과연 어떤 비결이 숨겨져 있는걸까.현장의 심층취재를 통해 미국경제가 경쟁력을 회복한 배경과 그 원천을 파헤쳐 우리에게 던져지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집중 분석해 본다.
[편집자註] 지난해 7월15일 뉴욕 파크 애비뉴 270.미국을 대표하는 거대 은행인 케미컬 뱅크 본부가 간판을 바꿔 달았다.새 간판은 체이스은행.이로써 케미컬이란 은행 이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그러나 사실상 없어진 것은 체이스맨해튼이지 케미컬이 아니다.
케미컬은행이 체이스맨해튼은행을 사들이면서 이름 하나만 남겨놓은것이기 때문이다.
두 은행이 합치기로 계약하고 간판을 바꿔 달기까지 몇달 동안팔려가는 처지인 체이스맨해튼에 대규모의 다운사이징(down-sizing)이 휘몰아친 것은 물론이다.감원대상이 되는 체이스 직원들을.화학(케미컬) 쓰레기'라고 부르는 살벌 한 농담들도 오갔다. 체이스는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대규모 감원을 시작,86년 4만7천4백80명이던 임직원 수를 지난해 초까지 3만3천5백명으로 줄이며 뼈를 깎는 자구노력을 해왔었다.그러나 한번잃은 경쟁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지난해 3월 1백억 달러에케미컬에 흡수되는 계약을 했다.은행내의 관료주의,.체이스 정도면 고객이 스스로 찾아올 것'이라는 오만등이 1799년 문을 열어 근 2백년 가까이 명성을 떨치던 체이스가 몰락한 원인이었다.체이스의 사례는 미국이 어떻게 경쟁력을 회복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미국에서 기업이란 언제든 경쟁력의 잣대로 얼마든지 새로 재단(裁斷)될 수 있는.상품'이다.그런 상품들을 사고 팔아경쟁력있는 상태로 새로 주조(鑄造)해내는 것이 인수.합병(M&A)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직업이란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경쟁력없는 사람은,또 경쟁력을 잃은 기업의 종업원은.체이스의 케미컬 쓰레기'처럼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서야 한다.조직도 인원도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하다면 가차없이 줄이거나 없앤다.
다운사이징이다.
그런 과정에서 영속(永續)하는 것은 기업도 일자리도 아니다.
경쟁력이다.
79년 이후 지난해 초까지 미국 사회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무려 4천3백만명에 이른다.그러고도 대규모 감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지난해 1분기에만 다시 16만9천명이 해고당했다는공식 통계가 나와 있다.
10여년 이상 뼈를 깎는 감원의 고통이 미국 사회에 몰아치는동안 원래.일시(一時)해고'를 뜻하던 레이오프(layoff)라는 단어는.완전 해고'라는 뜻으로 새로 정의(定義)됐다.
무자비하다 할 정도의 대량 감원 기록은 너무나 많다.델타항공사 1만8천8백명.전체 종업원의 4분의1.시어즈 백화점 5만명.AT&T 12만3천명.이스트맨 코닥 1만6천8백명….90년대들어서만 각 기업이 줄여버린 일자리의 숫자다.케 미컬 뱅크는 15개 부서를 단 한명의 여성으로 줄이기도 했다.
미국 기업들의 대량 감원 논리는 확고하다.시어즈 백화점의 아더 마르티네즈 회장은 5만명을 해고하며“남아있는 30만명의 종업원들,납품기업의 근로자들,주주들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기업의 사정이 나쁠 때만 대량 감원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아주 어렵지 않아도 경쟁력을 더 키우기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든다운사이징이 단행된다.
아이보리 비누.크레스트 치약등으로 유명한 프록터 앤 겜블(P&G)사는 93년 7월 전체 종업원의 12%인 1만3천명을 감원하고 전세계 공장의 20%인 30개 공장의 문을 닫는다고 발표한다.이유는“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더 키우기 위해서였다.
”(P&G사의 윌리엄 돕슨 국제담당 이사) 당시 P&G의 경영이 그렇게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다.전 회계연도에도 두자리 숫자의 수익증가율을 기록하며 계속 주식 배당을 늘려오던 터였다.그런데도 P&G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에드윈 알츠트 회장은“여기서 생기는 15억달러의 여력을 경쟁력 향상을 위해 투자한다”고선언했다.
감원을 하고 군살을 빼는 고통은 민간 기업에 국한되지만은 않았다. 워싱턴시는 지난해말 시의원 투표를 통해 1천명을 감원하기로 했다.심각한 재정적자를 겪고있는 워싱턴 시는 경찰.소방수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의 일자리를 줄일 참이다.이런 식으로 이미 79년 이후 지금까지 약 50만명이 공무원을 그만 뒀다. 최근에는 대학 교수들의 종신 재직 제도마저 흔들리고 있다.이 때문에 미네소타 대학등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교수들의 노동조합이 생길 판이다.
그러나 지난 10여년 이상 미국 사회에 몰아치고 있는 대량감원의 회오리를 단순히.인건비 축소를 통한 경쟁력 향상'으로 본다면 큰 잘못이다.
미국의 대량 감원은 기술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첨단 산업을중심으로 한 새로운 일자리의 창출과 맞물려 있다.
전체적인 그림을 그린다면.무자비한 감원'이라기 보다.고통스러운 인력 재배치'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79년 이후 4천3백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지만 같은 기간 7천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겼다.미국사회 전체로는 2천7백만명의고용이 오히려 더 늘었다.
어떤 식으로 어떤 일자리가 없어지고,어떤 일자리가 새로 생겼을까. AT&T는 10년간의 연구끝에 연간 10억 통화의 수신자 부담 전화신청을 음성인식 컴퓨터가 처리하는 기술을 개발했다.이와 함께 6천명의 교환원이 일자리를 잃었다.“모든 현금 자동지급기 뒤에는 3명의 은행창구 직원 망령이 있다”는 미국사회조크는 이래서 나왔다.
이렇게 실직한 사람들이 새로 어떤 직업을 구했는지에 대한 통계는 없지만 대부분 종전보다 수입이 못한 쪽으로 옮겨갔다는게 일반적 분석이다.
미국 경제는 좋아졌지만 미국 가계의 수입은 정체되었다는 통계가 이같은 현상을 증명한다.
그러나 새로 늘어나는 일자리 역시 기술진보와 관련이 깊다.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가 지난 2년간의 추이를 분석한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새 일자리의 38%가 소프트웨어.금융.회계등 서비스 분야에서 창출됐으며,66%는 평균 임금 수준 이상을 받는 일자리였다.
결국 감원당한 대부분의 개인들은 고통을 겪지만 미국 사회의 직업 구성은 경쟁력있는 분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미국의 기업과 근로자는 경쟁력의 축으로만 굴러가는 조직개편.감원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그 수레바퀴를 쉼없이 돌리는 힘은 시장이다.경쟁을 통한.단근질'이야말로 미국 경제의 르네상스를 이룩한 평범한 비결이다.
그 단근질을 이겨낸 미국 기업과 근로자들은.르네상스의 주역'을 자처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
워싱턴의 민간 싱크탱크인 경쟁력위원회가 경제계 인사들을 상대로 최근 실시한 조사결과 응답자의 75%는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지난 10년간 미국이 경쟁력을 회복하는데 대부분의 정부정책은 별 쓸모가 없거나 오히려 걸림돌이었다.”*** 워싱턴=김수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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