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올해 가장 가슴아팠던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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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올해 들은 가장 감동적인 말은 위독한 상태의 테레사수녀가 주위 사람들에게“나를 치료하지 말고 그냥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 둬 달라”고 했다는 그 당부였다.테레사수녀의희생과 봉사야 세상이 익히 알고 있는 터이지만 죽는 방식마저도가난한 이웃과 똑같이 하겠다는 그 지고한 연대의식과 애타(愛他)주의는 새삼스러운 감동을 안겨주었다.현실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처참히 패배한 후 결국 이기주의가 인간의 유일한 본성이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고 개를 들어왔다.그러나 그런 생각에 기울어진 우리들에게 테레사수녀는 우리의 본성에는 연대의식과 애타주의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일깨워 준 것이다. 한편 올해 들은 가장 놀랍고도 가슴아픈 말은 최근 남한으로 탈출한 김경호씨 일가족의 증언이었다.지난 17일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金씨 가족은“북에서는 고단백질인 태반이 임산부의 보신 특효약이다”“태반을 먹으려고 병원보다는 친정집에서 해산하기를 원한다”라는 증언을 했다.이런 일이 북한에서 얼마나 일반화된 일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그러나 설사 과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식량난이 그런 현상이 있을 정도로 극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산모가 영양보충을 위해 태반을 먹는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우리들의 강심장이요,냉담성이었다.타의에 의해 우연히 한쪽은 남이 되고 다른 한쪽은 북이 된 것뿐인데도 그 한쪽이 태반으로 영양보충을 한다는 증언을 접하고도 다른 한쪽은 혀나 끌끌 차거나 팔자소관으로 돌려버리고 말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너무도 냉혹하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기는 정부의 의도도 아리송하기만 하다.金씨네가 그토록 처참한 궁핍상을 털어놓도록 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북한 주민의 딱한 사정을 알려 인도적 원조는 재개할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것이었을까.아니면 북한의 사정이 저처럼 극에 달했으니 붕괴는 시간문제다,그러니 이 소리 저 소리 말고 더 빨리 붕괴되도록 현재의 봉쇄정책을 눈 딱감고 밀고 나가자라는 메시지를 국민들에게보내기 위한 것이었을까.아직도 인도적 원조도 허용 않고 있는 걸 보면 후자가 맞는 것인지 고개가 갸우뚱거려질 뿐이다.
남북관계가 이처럼 악화된 적이 과거에 있었던가.군사정권때도 아니고 명색이 문민정부시절에 남북관계가 이토록 경색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북한의 경직되고 교조적인 자세와 잠수함 침투등의 사건에만 책임을 돌리려 한다면 더 할 말이 없다.그러나 과연 우리 스스로에게는 문제가 없었던가,동구의 붕괴에 지나치게 현혹됐던 것은 아닌가,속에 묻어둘 말도 다 까발려 상대를 필요이 상으로 자극하지는 않았던가 하는 자기반성도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평소에는 흔히 북한문제에는 북한정권의 문제와 북한주민의 문제라는 이중성이 내포돼 있기 때문에 이를 분리해 파악해야 한다고들 주장해 왔다.그러나 최근엔 북한 당국이 밉다고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마저 막아버리는 일관성 없고 냉정한처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인도적 지원을 주장하는 종교계 인사들이 하는 말이 있다.“만약 우리가 이런 식의 나몰라라 하는 자세로 지내다가 통일이 된뒤 그동안 굶어 죽었거나 영양실조로 병든 북한 주민의 가족들이 우리에게.당신은 그때 뭐하고 있었소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할 것인가”하는 자탄이 그것이다.이 말은올해 우리들의 폐부를 가장 아프게 찌른 말일 것이다.
물론 북한의 붕괴가 곧 닥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4.19때 사람들은 민주화가 당장 다가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30여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최근 시사저널이 보도한 유엔산하 세계식량계획(WFP)의 특별 보고서는.북한의 내년 식량사정은 올해보다 훨씬 심각하겠지만 식량난 때문에체제가 붕괴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게임이론의 한 가설인.죄수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은 서로 상대를 믿고 위험부담이 있는 선택을 하는데 있다고 한다.얼어붙은 남북관계도 그래야 돌파구가 열릴 것이다.그리고 그런 이니셔티브는 상대적 강자인 우리 가 먼저 취하는게 순서이고 또 효율적일 것이다.
새해에는 테레사수녀뿐 아니라 우리의 가슴속에도 굶주린 동포에대한 따뜻한 연대의식과 애타주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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