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정우 칼럼] 남북문제에 정치 해법 쓴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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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남북문제가 정치화할 조짐이 보인다. 남북관계의 본질이 애초 군사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안보위협은 논란의 뒷전에 밀리고 남북문제의 상당부분이 마치 정치협상의 대상인 것처럼 비춰지고 있다. 사실 누구보다도 북측의 위협을 심각하게 다뤄야할 우리가 어떤 측면에선 가장 둔감하다는 것이 여론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년을 돌이켜 보면 미국.중국.일본 등 주변국이 하나같이 우리에겐 버거운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남북관계에서 상대적으로 협조적이었다. 또 우리의 목소리가 제법 먹혀드는 상대로 다가온 것도 사실이긴 하다.

참여정부 1년 동안 당국간 회담이 38차례 열렸다. 연중 106일 동안 회의가 열렸다고 하니 사흘에 하루 꼴로 남북이 마주앉은 셈이다. 인적 왕래도 늘었고 경제협력도 꾸준히 진척됐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일반국민 보기에 북한이 더 이상 위협과 경계의 대상으로 남기는 어려울 듯싶다. 군사문제 또한 점차 정치협상의 대상으로 변질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침 이런 현상이 국내 정치판의 변화에 따라 가속화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일부 정치인의 국가보안법 철폐 주장이나 남북 국회회담 제의가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등과 맞물려 어지럽게 전개될 것이다. 바야흐로 남북관계의 본질에 어떻게든 손을 대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게다가 한국 내 정치상황은 군사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어보려는 유혹을 부추기고 있다. 하기야 전쟁이라고 하는 극단적 군사행동마저 정치행위의 연장이라 역설했던 프러시아의 군사전략가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우리에게 닥친 군사적 도전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다만 우리의 역량에 대한 엄중한 평가가 우선돼야 한다. 주한미군의 자동개입 조건이 이완된 상황에서 우리의 안보가 보장될 수 있는지, 또 그런 여건에서 우리의 정치적 주장이 북측의 호응을 얻어낼 수 있을 만큼 무게가 실릴 것인지, 남북대화와 경협이 북핵 상황 악화를 막는 억지력으로 작용했다면 과연 그런 약발이 언제까지 먹혀들 것인지 등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북한 핵무기에 관한 정보를 우리가 독자적으로 판단할 '권리'를 갖지 못하고 미국의 석연치 않은 정보 분석에 따라 입장이 널뛰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서글픈 현실이라면 북핵 해법을 찾기 전 까지 남북관계가 상황 변화를 압도하는 '독립 변수'가 되기엔 여전히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이런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핵문제를 북.미 간에 풀도록 하되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설익은 정치적 발언으로 남북문제의 정치화를 앞다퉈 부추기는 정치인들은 역대 지도자들 가운데 미국의 힘을 가장 잘 이해하는 金전대통령의 전략적 고뇌를 나눠가져야 한다.

아울러 남북문제의 정치화를 도모하는 이들이 혹시라도 우리 젊은이들의 '말랑말랑한' 대북인식에 기대어 바람몰이식 처신을 하겠다면 이 또한 좌절에 직면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청년층 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미 부각된 마당에 경제사정이 빨리 개선되지 못할 경우 과연 이들이 남북관계의 정치화 추세와 어우러져 전개될 획기적인 대북정책을 변함없이 지지할 정도로 비(非)타산적일까 또한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향한 기대는 군사역량이 제한된 우리에게 정치적 혜안(慧眼)과 전략적 사고를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전략적 사고는 우리의 총체적 역량에 대한 점검에서 출발해야 한다.
길정우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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