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필링>저무는 96년 영화계를 돌아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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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상투적인 회고담.96년 한해를 되돌아보면,미안한 얘기지만 영화계에서 잘 되어간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헌법재판소에서 심의가.위헌판결'을 받았다고 심의위원회가 없어진 것도 아니다.그러기는커녕 심의필증 없이는 상영할 수 없다는 영화관의 일치단결(!)에 이제는 아예 영화사들이 알아서 가위를 들고 영화를 잘라서심의를 받는다.이것을 자율이라고 하는가.
부산.국제'영화제를 했다고 해서 우리 영화가 국제적인 수준에오르는 것도 아니다.그럼으로써 우리는 국제영화제 콤플렉스를 넘어섰는가.그러기는커녕 올해 한국영화는 변두리 국제영화제에서 칭찬을 받고 좋아서 어쩔줄 모른다.
.투캅스2'와.은행나무침대'의 성공으로 고무받으시는 그대.올해 한국영화는 이들 두편을 제외하고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반에서 60등을 해도 점심도시락을 싸와야 하고,아무리 적자가 나도직원들은 월급을 받아야 한다.한햇동안 60편의 한 국영화가 만들어지고 그 대부분이 흥행에 실패했다.아무리 지독한 도박판도 이렇게 나쁜 확률을 갖고 있지는 않다.수많은 기업들이 영화산업에 들어왔고,그리하여 실망해 떠났다.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그런데도 점점 더 시장은 커져가기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 속에서 가장 추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사람들은 독립영화 진영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다.96년 한햇동안 이상할 정도로독립영화는 나쁜 상황만을 맞이했다.그동안 장기수 문제를 다뤄온.분단을 넘어선 사람들'을 기획하고 있던.푸른영 상'이 압수수색을 당했고(이제 홈비디오를 만들던 당신도 불법비디오 제작자로언제 고발당할지 알 수 없다),국제인권운동단체인 앰네스티와 함께 준비한 제1회 인권영화제는 소개되는 영화들이.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영화제 기간 내내 압력을 받았다.아무런 작품의 성과는 없었으며,다만 11월에 영화제작소.청년'에서 만든 정지우감독의.생강'이 제3회서울단편영화제에서 작품상과 예술공헌상,그리고 젊은 비평가상을 받았을 뿐이다.
이 속에서 독립영화 진영은 그동안 내내 검열탄압에 맞서 싸워온 전리품을 약탈당한 것이다.사실.심의 위헌판정'은 이제는 활동을 중단한 독립영화단체 장산곶매가.닫힌 교문을 열며'에 대한탄압에 이의신청 제기를 해 얻어낸 것이다.정말로 등급에 관한 논의나 하자고 이 길고 지루한 싸움을 해온 것이 아니다.그런데도 정말 이 승리가 누구의 전리품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서로물어뜯고 난리가 벌어진 것이다.정작 장산곶매는 아무런 권리신청을 하지 않았는데도.
정말 무시무시한 연말연시다.이 모든 싸움이 어느것 하나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로 내년으로 연기됐기 때문이다.그래서 모두들 칼을 갈며 내년을 기약하고 있다.베지 않으면 내가 쓰러지는 것이다.이 싸움에는 명분도 없고 정의도 없다.그러다 보니 아무도서로 연대하지 않으며,또 그러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모두의 싸움은 각개전투가 될 것이다.옛 어른의 말씀에 틀린 것 없다더니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예나 지금이나,언제 어디서나 예외가 없는 것이다.그래서 이 새로운 내년은 살아남기의3백65일이 될 것이다.
구경꾼들에게야 재미있겠지.하지만 이곳에 몸담고 있는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과 나의 동료들,선.후배들과 나 자신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해피 뉴 이어'.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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