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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대통령 직무복귀] 上. 고건 대행 63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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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 14일 고건 총리(左)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스승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정부 중앙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

고건(高建)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는 예기치 않은 헌정 사상 초유의 정치실험이었다. 허정 과도내각 수반과 최규하 권한대행 때와 달리 대통령의 복귀가 어느 정도 예상되는 상황에서 대행 체제가 운영돼 더욱 그렇다. 63일간의 대행 체제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두 차례에 걸쳐 '고건 대행 체제의 대차대조표'를 집중 분석한다.

지난 3월 12일 盧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가결된 직후. 고건 총리는 이날 비서실 관계자들에게서 대행의 역할과 권한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김철수 명지대 석좌교수가 쓴 '헌법학 개론'이 보고의 핵심 내용이었다.

高총리는 이날 오후 소집된 임시 국무회의 때 "정부의 각종 위원회가 추진하고 있는 국정과제는 위원장이 직접 챙기고 내각은 적극 협조하라"고 지시했다. 金교수의 '헌법학 개론'에 명시된 대로 권한대행의 역할을 '단기적 국정관리자'로 국한한 것이다. 통치권자의 결단이 필요한 정책 및 인사발령에 대해선 선을 그어놓았고, 끝까지 그 범위 내에서 움직였다.

대행기간 중 高총리의 최우선 과제는 '국정공백의 방지'였다. 이를 위해 高총리는 정부의 위기관리시스템을 가동시켰다. 高총리는 직접 지시보다는 시스템 가동의 조타수 역할을 자임했다고 총리비서실 관계자는 말한다. 경제분야는 이헌재 부총리를, 외교.안보 분야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를 중심으로 시스템이 돌아갔다. 과거엔 대통령의 통제를 받으며 권력의 중추신경 역할을 하다 참여정부 들어 독립기구로 거듭난 국정원.검찰.경찰.국세청도 법률에 따른 기능과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국가신용등급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가는 다시 오르고 환율은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사회적으로도 큰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국무조정실 관계자는 "분야별.기능별 시스템이 하나의 정부시스템으로 통합돼 제 기능을 했다"면서 "高총리의 지침에 앞서 경찰이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탄핵 반대 촛불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대처한 게 시스템 가동의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다.

그러나 탄핵정국 초기 국정운영이 비교적 원만하게 진행된 것은 시스템 가동 못지않게 당시 특수상황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학계에서 나온다. 돈 안 쓰는 선거제도가 첫 도입된 17대 총선이 무난하게 치러진 것도 시민사회가 성숙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정용덕 교수는 "고건 대행 체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된 것은 사회 및 정부의 시스템이 성숙됐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대통령의 복귀가 예견된 데다 총선을 앞두고 탄핵 역풍을 최소화하자는 야당의 전략이 국정운영에 더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高대행 체제가 항상 원만했던 것만은 아니다. 高총리는 3월 17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지금같이 민감한 시기에 민감한 정치사안에 대해 발언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달라"고 국무위원들에게 지시했다.

高총리가 장관을 특정하지 않았지만 강금실 법무부 장관을 겨냥했다는 게 총리실의 분석이었다. 앞서 康장관은 "가능하다면 (17대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취하하는 게 현재로선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말해 야당의 반발은 물론 선거 중립 시비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특히 高총리는 탄핵정국 초기 야당의 '고건 띄우기'와 盧대통령에 대한 부담 때문에 너무 몸을 낮춰 총리 본연의 업무에만 매달렸다는 평가도 나온다. 高총리는 한.미관계를 비롯해 국내정치 상황과도 첨예하게 맞물린 이라크 추가 파병에 대해선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또한 4월 말까지 '5년 중기 국가재정운영계획'을 수립했어야 하는데 이를 하지 않아 내년 예산 편성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부 조직개편안과 신행정수도 건설 추진 등의 대형 계속사업과 정책도 표류 중이다.

지난달 22일 발생한 용천 참사가 북한 개방의 호기가 될 것이라는 정부 판단에도 불구하고 高총리는 북한 총리에게 친서를 보내려다 그만두는 등 적극적으로 진전시키지 못했다. 盧대통령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특별취재팀=이철희.최훈(정치부), 김남중(정책기획부), 홍병기(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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