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과한국인의삶>11.끝.멋있는 사람을 위한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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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멋있는 사람’이라는 그 말만 들어도 어떤 흐뭇함을 느낀다.같은 찬사라도 학식이 해박한 사람,인격이 고매한 사람,용모가 수려한 사람등이 주는 완벽에서 오는 어떤 위압감이나 거리감과는 다른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멋은 유화 아닌 수채화,서양화 아닌 동양화의 느낌이며,어떤 하나의 뾰족함이 아니라 어떤 여럿의 어우러짐이 주는 느낌이다.

멋있는 사람의 그 무엇이 우리에게 그런 흐뭇함을 주는 것일까. 우선 우리는 어떤 물리학자가 아주 해박한 물리학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멋이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그러나 그가 동시에 대금도 불 줄 알고 스키도 탈 줄 알고 서도에도 달필이라면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낀다.어떤 시인이 동시에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고 검도에도 일류라면 멋있는 사람이다.여간 아니고는 시인은 시만으로, 과학자는 과학만으로는 멋이 있을 수 없다.그래서 옛날에도 ‘풍류’는 유·불·선 삼묘(三妙)의 갖춤으로 보았고,문무 겸비도 한 칭송이었다.문인도 문인화를 멋으로 즐겼다.

이는 멋있는 사람의 한 조건이 ‘인간의 폭’임을 말한다.즉 인간으로서의 지성·덕성·감성,기타 폭넓은 인간적인 특성들이 어우러져 있는 전인성(全人性)을 말한다.이런 인간의 폭은 실은 모든 사람의 자아실현의 첫 목적이며 인간다운 인간의 첫 조건이기도 하다.그래서 교육에서는 ‘전인’ 추구를 이상으로 여긴다.

기실 사람들은 학덕만 아니라 인정도 있는 전인적인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한다.또 자기도 공부만 아니라 잘 어울려 놀 줄도 아는 ‘멋있는’사람이라고 칭찬받으면 좋아한다.뿐만 아니라 스스로 기회만 닿으면 예술도 하고 스포츠도 하려 하고,또 스스로를 일이나 돈이나 출세에만 관심있는 자가 아닌 ‘지(知)’도 ‘덕(德)’도 있는 전인적인 존재로 취급해 주기를 바란다.

다음 우리는 모차르트·아인슈타인·피카소와 같은 천재들의 행적에서 어떤 인간적인 멋을 느낀다.그들은 ‘인간의 깊이’ 또는 ‘높이’라고 할 수 있는 창조성이 멋의 또 하나의 조건임을 암시한다.창조란 ‘없던 것을 있게 하는 일’,또는 좁게는 ‘새로운 것을 있게 하는 일’을 말한다.그것은 자아실현이 또 하나의 목적이다.이런 창의·창작·창조는 새롭고 희한한 것이기에 언제나 멋이 있다.천재적인 창조는 물론 그렇지만 어린 아이가 그린 창작그림에도 그 나름의 멋이 있다.

이런 천재들은 그 창작만 아니라 그들의 어떤 공통된 형태에서 더 멋을 느끼게 한다.대개 천재들은 ‘어린애 같은’데가 있다.자주 보는 사진의 아인슈타인 얼굴은 ‘늙은 동안(童顔)’이다.거기엔 사무사(思無邪)의 멋이 있다.모차르트도 일상행동은 어린애 같았고,피카소는 어린애처럼 욕심꾸러기고 충동적이었다.그래서 그들은 세상사를 초탈하는 멋을 겸한다.또 천재들은 대개 기존 체제·관념·관례에 반항하고 그 과정에서 심한 갈등및 역풍과 싸운다.그것은 연약한 인간의 강렬한 도전이기에 멋이 있다.그들은 대개 개성이 강한데도 멋이 있다.멋있다고 어떤 유행을 따르는 것은 개성적이 아니기에 이미 멋이 아니다.

리고 우리는 가끔 영화에서 보듯,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을 그의 행복을 위해 멀리 떠나보내는 애틋하면서도 산뜻한 사랑의 주인공에 멋을 느낀다.거기엔 자기 욕심을 위한 치근치근함이 아니라 아집을 넘어 남의 행복,남의 인간적 성장을 위하는 간절함이 있다.우리는 이런 관계를 인격적 관계라고 부른다.그것은 가장 멋있는 사람들의 ‘멋있는 사이’를 말한다.칸트의 말대로 사람을 수단 아닌 목적으로 삼는 관계며 서로 인격을 잠식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인격의 성장을 바라는 관계다.

아마도 진정한 모자의 사랑,남녀의 사랑,사제지간의 사랑 그리고 ‘종교’의 사랑에는 이런 애틋하고 산뜻한 ‘떠나보냄’이 내재해 있을 것이다.흔히 ‘너 죽으면 나 죽고,나 죽으면 너 죽는다’는 공생관계를 진정한 사랑으로 오인하는 수가 많으나,그것은 실은 인격 잠식의 관계에 불과하다.진정한 사랑은 ‘내가 죽어도 너는 살아라’일 것이다.

이런 인격적 관계의 근본에는 남의 희로애락을 내 일처럼 느끼는 ‘감정이입’ 또는 ‘감정공명’의 기제가 있고 또 있어야 한다. 즉 “남 보기를 내가 나 보듯”하는 기제다.그런 아집없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멋을 느낀다. 또한 우리는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꽉 막히고 답답하고 좁고 옹졸하고 옹고집인 사람에게서는 멋을 찾지 못한다.도리어 개방성이 있어서 양반이면서도 양반티를 내지 않고 천민과 같이 놀 줄 아는 사람,철인이면서도 시정배와 같이 할 줄 아는 사람,한국인이면서도 세계에 마음과 가슴이 삽상하게 탁 트인 사람에게서 멋을 느낀다.그런 멋있는 사람들이 멋있는 사이를 이룬다. 이렇게 트인 사람은 ‘자기 객관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즉 자기 자신의 장단점,기타 특징을 자기를 벗어나 ‘밖’에서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다.말하자면 ‘나 보기를 남이 나 보듯’하는 기제다.전에 필리핀의 유엔 대사 로물로는 키가 아주 작았다.키가 큰 서양 외교관들이 “키가 작아 불편이 많겠소”라고 그를 놀렸다.이때 로물로가 “내가 뭐가 키가 작으냐!”라고 벌컥 화를 냈다면 그는 속물이다.그러나 그는 미소 지으면서 “난 언제나 나를 큰 동전들 사이에 낀 은전이라고 생각하고 있네”라고 선선하게 대답했다.자기를 객관화할 줄 알았다.

런 개방성이라는 견지에서는 한국사회의 곳곳에 깃들여있는 여러 집단간·지역간,그리고 대외적인 폐쇄성은 한국인이 멋있는 사람이 되기를 어렵게 하는 셈이다.자기중심적이 아닌 개방된 지각·해석·평가,그리고 무엇보다 개방된 상상이 멋을 풍긴다.그런 개방성은 동시에 다양성의 수용을 의미하며 그리고 현대적 ‘시민사회’의 필수요건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초탈’에서 멋을 느낀다.김삿갓의 멋은 그의 시도 시지만 그의 세속을 초탈한 행각에서 더 느껴진다.성철 스님의 ‘물은 물이요…’,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시공(色卽是空)’,노자의 ‘대광불요(大光不耀)’,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필생즉사(必死卽生,必生卽死)’라는 표현들도 어딘지 초탈한 멋을 풍긴다. 멋있는 사람의 초탈의 제일보는 우선 세속적인 관례관습과 부귀공명의 집착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관례만 고집하거나 출세나 치부나 공명 얻기에 눈이 벌건 모습은 멋과는 거의 정반대 모습이다.다음 단계로 우리는 인간의 삶에 필연적인 여러 이분론적인 갈등-희비·애환·고락·애증·동과 서·우리와 적·이성과 감성등-을 초극하는 사람에게서 더 큰 멋을 느낀다.이런 초탈·초극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아마도 가장 높은 초탈은 생사를 초월한 어떤 달관,어떤 종교적 경지일 것이며 그런 경지는 대개 전체론적·연관론적·자연-인간합일론적인,그리고 때로는 언뜻 보기엔 당착적인 달관을 포함한다.신학자 틸리히가 말하듯 ‘신의 이름으로 신에 반항해 신을 초월하는 믿음’‘의심과 무의미와 공존할 수 있는 신앙’‘절망의 수락은 그 자체가 신앙과 존재용기(勇氣)의 시작’이라는 표현은 이런 달관의 예다.이런 고도로 멋진 달관은 물론 쉽지 않다.그것은 아마도 인간 자아실현의 최고의 차원이고 따라서 멋의 최고 차원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특성이 전인성과 창조성,인격적 관계와 개방성, 그리고 초탈성이라면 멋있는 사람이란 결국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다.그런 멋있는 사람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육사의 어디에서건 길러진 것임에 틀림없다.멋있는 사람들이 멋있는 사이를 이루면서 멋있는 나라를 만들려면 필연 우리는 그런 사람을 길러낼 수 있는 멋있는 교육이 이 나라에 있느냐 없느냐에 생각이 이르지 않을 수 없다.전인·창조·인격·개방·초탈의 함양과는 동떨어진 한국의 가정교육·학교교육,그리고 사회교육의 풍토가 이런 멋있는 사람을 길러내기엔 너무 부적한 교육여건이라는 인식과 함께 그 개선의 노력이 한국에서 멋을 찾는 길의 첫걸음이 돼야 할 것이다. 정범모 <전 한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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