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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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전쟁'은 결과적으로 프리 섹스의 시기다.인간의 연줄이 일시에 끊기고 새로이 맺어지는 혼란의 수렁이기도 했다.
죽음으로써만이 아니라 멀쩡하던 부부가 헤어지고 서로 새 짝과만나는 경우도 있었다.아내 아닌 다른 여자와 정을 나누던 이는이 기회를 놓칠 세라 연인과 함께 야간도주했다.이혼.재혼이 수두룩했다.피난 중에 어쩌다 관계 맺어 생전 모 르는 남자의 아이를 낳은 여자도 있었고,아이 밴 여자와 상관하다 남의 아이까지 떠맡은 남자도 있었다.
이런 시절에도 을희는 달팽이처럼 딱딱한 껍질 안에 자기를 가두어 살았다.임신한 몸으로 남편의 전사 통지를 받은 기막힌 처지가 그럴 수밖에 없게 했고,둘째 남편을 만나 결혼한 다음에도그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달팽이는 양성(兩性)동물이다.한마리의 달팽이가 질(膣)과 페니스를 함께 갖춘 암컷이요 동시에 수컷이다.
하지만 그들도 성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또 한마리의 암컷과 수컷을 필요로 한다.이중교미(二重交尾)를 해야 하는 기묘한 생물이 달팽이다.
을희는.교미하지 않는 달팽이'였다.
자기 안에 암.수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암.수를 찾지 않았다.때로는 수컷처럼 일벌레가 돼야 했고,그러면서도 암컷처럼 어미 노릇을 해야 했다.그 양성적인 생활구조가 을희의 섹스의식에도 영향을 미쳤다.강한.나홀로'의식이다.
남편이 을희의 몸을 요구하면 응하기는 했으나 스스로 요구해본적은 한번도 없었다.요조숙녀(窈窕淑女) 태 너무 부리지 말라며남편은 몇차례 볼멘소리를 냈지만 을희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만약 남작부인이 된 매춘녀처럼 간교 같은 끼라 도 부렸다면 남편은 이혼까지 하진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컷이야 늘 주려서 걸걸하는 애정 동물이다.암컷이 던져 주는한덩이 고기나 한마디 말에 기가 산다.
그 이치를 몰랐던 것은 아닌데 끝내 하지 않았던 까닭은 상대를 잘못 만난데 있지 않았을까.을희는 요즘에야 되짚게 된다.
을희의 마음을 감미하게 열어주는 남자를 만났었더라면 을희의 밤살이도 영 딴 것이었을 수 있고,을희의 인생도 아주 달라졌을수 있다.
불감증이었던 아리영이 처음으로 오르가슴을 느꼈다 한다.그 말이 사실이라면 둘은 결코 서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매사에 소극적이었던 아리영이 적극적으로 변신하는 모습이 선히 보이는 듯했다.변신의 첫 단계.그것은 이혼이다.그러나 그 녀의 이혼이수월하게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커다란 소용돌이가 예상됐다.
글=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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