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검찰 60년] 최대교 “임영신 기소 말라” 이승만 지시 거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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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5월. 최대교(1901~1992년) 당시 서울지검장에게 법무부 장관의 서면이 전달됐다. ‘임영신 상공부 장관을 기소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의사가 반영된 지시였다. 그러나 최 검사장은 정권의 실세였던 임 장관을 수뢰 혐의로 불구속 기소한 뒤 옷을 벗었다. 정권의 뜻을 거스른 것이다. 59년 뒤인 지금 최 검사장은 후배 검사들로부터 ‘강직한 검사’의 사표로 기억되고 있다. 이 사건이 검찰이 발표한 역대 20대 사건에 포함된 이유이기도 하다. 검찰이 31일 60주년을 맞는다. 이날은 1948년 권승렬 초대 검찰총장이 취임한 날이다.


◆기개를 보여줬던 검사들=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준(1858~1907)은 최초의 검사로 평가받고 있다. 갑오개혁기 법관양성소 1회 졸업생인 그는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 시보로 임용됐다. 검찰 60년사 이전의 인물임에도 그는 지난해 대검찰청으로부터 ‘자랑스런 검찰인’에 선정됐다. 1907년 고종의 은사(지금의 사면) 명단을 임의로 변경한 법무대신(지금의 법무부 장관)을 고소한 기개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사법 살인’이라는 암울한 과거사로 남은 인혁당 사건 뒤에도 용기 있는 검사가 있었다. 1964년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 사건을 발표하고 검찰에 송치했다. 당시 서울지검 이용훈(현 변호사·81) 부장검사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소를 거부했다. 그는 후배 검사 3명과 함께 검찰에 사표를 냈다.

◆계속되는 도전=70년대와 80년대는 검찰의 암흑기였다. 검찰 관계자는 “권위주의 정권이 계속되면서 검찰보다는 안기부 등 특수 공안 기관에 힘이 실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치 검찰’이라는 불신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5공화국의 7년 동안 5명의 검찰총장이 경질됐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민주화의 기폭제가 되면서 검찰에도 개혁이 과제로 주어졌다.

91년 수서비리 사건에서 대검 중수부는 ‘성역 없는 수사’를 모토로 내걸기도 했다. 2003~2004년의 대선 자금 수사를 이끈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현 대법관)은 2004년 국제검사협회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 그는 당시 “대선 자금 수사는 진정한 민주사회를 위한 도전이었고 이런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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