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규제 '완화'와 '철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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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deregulation이 일본에서 규제완화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스꽝스런 일이다..deregulation'이야 규제.철폐'지 규제.완화'가 아니잖은가”.얼마전 일본의 대표적 종합상사인 마루베니(丸紅)의 도리우미 이와오(鳥海巖)사장 이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먼저 자책이자 사과부터 하는게 순서겠다.명색이 국제경제팀이란부서에 몸담고 있는터라.deregulation'이란 단어야 수없이 봐왔으면서도 지금껏 내 머리엔 그 단어에 대한 우리말이.
규제완화'로 자리잡고 있었다는데 대해 말이다.그 러니 선진각국의.deregulation'-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원어로 표기함을 이해해주시길-사례를 보도할 때 그 본뜻이 본의 아니게 왜곡된 적이 많지 않았겠는가.
영어의 접두사.de-'는 기본적으로 없애거나 떼어낸다는 뜻이다.물론.devalue(평가절하)'에서 보듯 줄인다는 뜻도 담고 있으나.deregulation'은 아무래도 규제철폐 또는 규제해제가 맞는 번역이다.새삼스레 들춰본 영한사전 에도 그 해석에 완화나 감소라는 용례는 나와있지 않았다.
난데없는 단어풀이로 시작한 까닭은 한국의-도리우미사장이 빗대어 말했듯 그 점에선 일본도 그다지 나을게 없다-그 뿌리깊은 규제는 바로 서구적 용어인.deregulation'이 잘못 받아들여졌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철폐 또는.없앤다'는 것과 완화 또는.줄인다'는 것은 그 뜻에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있다.구미 각국 정부가.deregulation'할 때야 규제를.없앤다'는 차원에서 시작할 터이지만우리 정부가.deregulation'할 때는 규제를.줄이는'것으로 생각했을 터이니 어찌 그 강도(强度)와 결과가 같을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줄인다'는 것은 결국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론 일정부분 그대로.놓아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그러니 그 숱한.deregulation'정책들이 주로 서류의 가짓수나 몇개 줄이고,의무비율이나 한도 따위를 높이거나 낮추고 하는 등의 생색내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deregulation'을 규제철폐가 아니라 완화로 간주할때는.한계'를 두게 마련이다.그 한계는 그동안 여러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다발 남아있는 서류뭉치일 수도 있지만 더 큰한계는 이른바.규제의 성역(聖域)'이다.
.성역'의 바탕이 되는 정책적 의도는 규제를 만들고,그 규제가 상당부분.존재이유'가 되며,따라서.deregulation'을 규제.완화'로 간주하려는 사람들의 머리에 있다.그래서 정책적 의도는 대부분 과대평가돼 성역을 양산하게 마련이 다.
예컨대 물가안정을 위한 가격규제나 임금억제 또는 경제력집중억제를 위한 각종 제한및 예외조항들이 그런 것들이다..지도'나.
자율'이란 미명아래 이뤄지는 가격에 대한 인위적 개입은 기업의불합리한 행동을 유발하고,이는 결코 물가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면서도 물가지수 맞추기에는 그만이란 점에서 이에대한 규제는 하나의.행정편의적 성역'으로 남아있다.
경제력집중도 따지고 보면 과거 정부의 규제와 개입-독과점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진입장벽이나 특혜를 수반한 산업합리화등-에서 비롯된 부분이 허다함에도 이제 다시 그 폐해를 문제삼아 또다른 규제로 맞서는 것은 옳은 대응이라 볼 수 없 지만 이 또한.여론영합적 성역'으로 간주된다.
이러한.성역'들이 논외로 치부돼선 진정한.deregulation'을 얘기할 수 없다.
얼마전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경쟁력 10% 높이기'의 일환으로 행정규제의.혁파(革罷)'를 강조했다.말은 뜻을 담는 그릇이다.언어선택이 이쯤 돼야.deregulation'을 논할 수있다..deregulation'은 규제완화가 아 니고.규제철폐'또는.규제혁파'로 옳게 쓰여져야 하며,그것이 불필요한 규제를.없애는'첫걸음이다.
(국제경제팀장) 박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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