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공부] 토론, 흥분하지 말고 수다 떨 듯 즐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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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교육청 주최 제1회 고등학생 토론대회 가보니

“인터넷 실명제를 강화하면 ‘불펌’이나 ‘악플’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테러단체인 KKK단이 가면을 벗고 시위할 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것이 한 예입니다.”

>> 찬성 측 입론 명덕외고 이상민군

“현행법 안에서도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데 국민을 ‘예비 범죄인’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개인정보가 유출될 우려가 있습니다.”

>> 반대 측 입론 현대고 임지연양

“사이버 범죄 증가율이 높아지고, 악플로 유명인들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인터넷 실명제 강화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 찬성 측 결론 명덕외고 윤혜수양

“위키피디아나 지식IN에서 대중의 지혜와 집단지성을 확인했듯 강제적인 법의 제한보다 자정 기능이 중요합니다. 네티즌의 의식 전환이 근본적인 해결책입니다.”

>> 반대 측 결론 현대고 권은율양

<그래픽 크게보기>현대고-명덕외고 ‘토론배틀’ 가을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25일 오후 4시, 서울 강북구 신일고 차이코프스키홀 4층 강당. 서울시교육청 주최 제1회 고등학생 토론대회 결승전에서 맞붙은 현대고 ‘천하무적’팀과 명덕외고 ‘시론’팀이 ‘인터넷 실명제를 지금보다 더 강화해야 한다’를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학생과 학부모, 교사 150여 명이 관람석에서 이들의 난타전을 지켜봤다.

지구별 예선에서 우승한 23개 팀 학생 69명은 이날 오전 본선 1차전에서 7개 조로 나뉘어 ‘한국어는 세계 공용어로 가능한가’를 주제로 원탁토론을 벌였다. 명덕과 구일, 현대와 계성여고가 토너먼트 대결을 벌인 2차전은 입론-교차조사-반박으로 이어지는 세다(CEDA)토론으로 치러졌다. 상대방 논거의 허점을 공략하기보다 주장을 반복하거나 말을 더듬는 토론자도 있었다. 박정하(성균관대 교수) 심사위원장은 “입론과 같은 내용의 반론을 펼치거나 교차조사를 활용하지 못하는 팀이 있어 아쉬웠다”며 “토론 후 논술을 통해 사고력을 키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날 ‘토론배틀’ 승자는 현대고였다.

토론왕 3총사 “학교 도서관이 아지트” 토론왕이 된 현대고 3총사는 여름방학 때 ‘토론으로 배우는 논술’ 강좌를 함께 들었다. 김진황 교사의 ‘특명’을 받은 정영훈군이 임지연·권은율양에게 SOS를 쳤다. 자료조사의 귀재인 영훈, 방송반 아나운서로 임기응변이 뛰어난 은율, 영화 매니어로 논리적 대응력이 돋보이는 지연 등 ‘황금 트리오’가 결성됐다. 학교 도서관은 이들의 아지트였다. 이양은 “중간고사와 대회 준비 기간이 겹쳐 4일간 시험 준비도 못했다”며 “점심시간과 방과 후 인터넷과 신문, 석·박사 학위논문, 사회과학책을 뒤져 자료를 모았다”고 말했다.

정군은 인터넷 실명제 근거 자료를 A4 용지로 900장 수집해 친구들이 ‘괴물’이라 부를 정도였다. 정군은 “신문기사를 토론학습의 교재로 삼았다”며 “기사에 밑줄을 긋고 찬성-반대라고 쓴 후 이를 반박-재반박하는 ‘꼬리에 꼬리 물기’ 토론을 했다”고 말했다. 임양은 “존 로크의 『정부론』과 영화 ‘마스크’를 통해 정부의 역할과 익명성에 관한 자료를 모았다”며 “세다토론에 맞춰 역할을 정한 후 모의토론을 많이 했다”고 우승 비결을 소개했다.

시론팀은 방과 후 NIE·논술반 수업을 함께 들은 학생 3명이 만들었다. 레세페르경제동아리회장인 이상민군, 개로이밴드 드러머인 윤혜수양, 일주일에 10권씩 책을 읽는다는 김수열군이다. 이군은 “교차조사에서 상대방 토론자가 ‘거기까지 듣겠습니다’라고 했는데 흥분해서 계속 주장을 펼쳤다”며 아쉬워했다. 윤양은 “통계청 홈페이지와 여론조사 등 논제를 뒷받침하는 근거 자료를 열심히 모았다”며 “평소 신문 테마일기를 통해 토론의 기초체력을 다졌다”고 말했다.

정영훈군은 “선생님이 들려준 힐러리 클린턴 미국 상원의원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힐러리는 공화당원이었다가 토론을 통해 민주당원이 됐다고 들었어요. 우리 셋 역시 자료조사 과정에서 평소 생각이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인터넷 실명화 강화 반대 입장이었는데 찬성으로 돌아섰거든요. 다양한 각도에서 시사이슈를 분석할 수 있다는 게 토론의 매력 같아요.”

논쟁을 즐겨라 … ‘토론수다’를 떨어라 이들은 토론의 달인이 되려면 논쟁을 즐기고, 친구들과 ‘토론 수다’를 떨어보라고 권했다. “자신의 주장을 두려움없이 말하는데 익숙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론을 잘하면 대학입시 구술면접에서 고득점을 하는 데 유리하다. 명덕외고 김면수 교사는 “입시가 아니더라도 토론학습은 창의성,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는 데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김진황 교사는 “독서-토론-논술은 단계별로 연계돼 있다”며 “특히 토론학습을 통해 말하기, 듣기, 읽기를 한꺼번에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하이퍼텍스트처럼 모든 교과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학습해야 토론의 달인이 된다”며 “최근 유행하는 ‘통섭(統攝, consilience)이 토론학습에도 적용된다”고 덧붙였다.

글=박길자 기자, 사진=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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