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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끔찔끔 돈 푸니 시장은 시큰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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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부가 다급해졌다. 잇따른 대책에도 금융시장 상황이 갈수록 나빠지면서다. 23일 정부는 은행채는 물론 증권·자산운용사가 보유한 채권까지 한국은행에 사달라고 요구했다. 이날 한은은 총액대출한도를 2조5000억원 늘리는 방법으로 은행에 자금을 대주기로 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언 발에 오줌 누기’ 정도로 판단한 듯하다. 사실 총액대출한도 확대는 한은이 꺼낼 수 있는 카드 중 가장 가벼운 것이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의 자금 부족을 해결하기에도 역부족이다. 이날 한은의 대책 발표 직후 주가 하락 폭이 깊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날 임승태 금융위원회 사무처장은 “증권사와 자산운용사가 보유한 국고채와 통화안정채권(통안채)을 한은이 중개기관을 통해 매입하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식을 살 여력이 없는 자산운용사에 돈을 풀어 시장의 안전판 역할을 맡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자산운용사들은 최근 3일간 5600억원어치의 주식을 순매도했다. 같은 기간 외국인투자자의 순매도(4700억원)보다 많다.

그러나 이런 대책들의 효과에 대해 시장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한 자산운용사 펀드 담당자는 “주식형 펀드의 채권 편입 비중은 10%도 안 된다”며 “상징적 조치에 그칠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국고채를 팔아 생긴 자금으로 주식을 샀다가 주가가 또 떨어지면 자산운용사마저 부실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는 이날 한은의 은행채 매입을 다시 요구했다. 이에 대해 장병화 한은 정책기획국장은 “내부적으로 은행채를 언제, 어떤 식으로 매입할지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성태 한은 총재는 이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4분기에 도래하는 은행채 25조원어치 전부를 중앙은행이 인수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제한적으로 은행채를 사주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 시중은행의 자금 담당 부행장은 “돈을 찔끔찔끔 쓰면 효과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며 “좀 더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와 은행권이 은행채 매입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은행채가 금융시장의 동맥경화를 불러오는 주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23일 현재 3년짜리 은행채(AAA 등급)의 금리는 연 7.75%로 1년 전(5.79%)에 비해 1.92%포인트 올랐다. 그나마도 신규 발행이 거의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은행의 유동성 문제가 불거지자 누구도 섣불리 투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채 금리가 오르면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가 오르고 이는 대출 금리 상승→가계와 기업의 이자 부담 증가→투자와 소비 감소로 연결돼 경제 곳곳에 상처를 남기게 된다.

은행채가 적절히 소화되지 않으면서 카드·리스·캐피털·저축은행도 자금 조달에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은행에서 돈을 조달하지 못하는 데다 은행채보다 부도 위험이 높은 까닭에 채권 발행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그중 형편이 좀 괜찮은 카드사의 채권도 최근 발행 금리가 6개월 전보다 2.5%포인트가량 높은 8% 중반으로 치솟았다. 우리금융지주가 우리파이낸셜에 3000억원을, 현대자동차와 GE캐피탈은 현대캐피탈에 3년간 10억 달러의 신용 공여한도를 제공키로 하는 등 모기업에 손을 벌리는 제2금융권 회사들도 늘고 있다.

김준현 기자

◆총액대출한도=한국은행이 중소기업 지원 실적과 연계해 은행에 자금을 빌려주면서 설정한 월별 한도. 일종의 정책자금이라 싼 금리로 빌려준다. 한도는 분기마다 정하는데 이번엔 이례적으로 분기 중에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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