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희칼럼>판정권위 인정받는 풍토 아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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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영국 문전으로 띄워진 공을 향해 두명의 선수가 동시에 뛰어올랐다.한사람은 181㎝의 장신 골키퍼 실턴이었고 또 한사람은166㎝의 단신인 아르헨티나의 골게터 마라도나였다.그들의 신장차이는 15㎝였고 손까지 쓸 수 있는 골키퍼의 경우를 생각하면실제의 신장차이는 50㎝가 넘는 것이었다.두사람이 공중에서 엉켰다 떨어지는 순간 공은 영국 골네트를 뒤흔들고 있었다.실턴은완강한 몸짓으로 골을 인정하지 않았다.마라도나가 왼손으로 쳐 넣은 것이라고 항의했으나 이미 주심의 휘슬은 골을 인정하고 있었다」. 86년 멕시코에서 열린 제13회 월드컵축구 준준결승전때의 일이다.경기가 끝난후 사진과 TV화면으로 확인한 결과 그상황은 마라도나의 명백한 반칙으로 판명되었다.그러나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마라도나의 말이 걸작이었다.
『볼을 때린 왼손은 나의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었다.』반칙골이 있은 3분후 마라도나의 신기가 발휘된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였다.미드필드에서 공을 잡은 마라도나는 5명의 수비를 차례로 제친후 골키퍼 실턴마저 따돌리고 텅빈 골을 향해 회심 의 슛을날린 것이다.반칙으로 골을 넣었다는 비난은 월드컵사상 가장 「화려한 골」이라는 찬사에 묻혀버렸다.영국은 결국 2-1로 패했다.판정의 권위는 살리되 심판의 오심은 엄하게 다스림으로써 국제축구연맹(FIFA)은 가까스로 체면을 유지했다.
명백한 오판이나 오심도 일단 선언되면 번복되지 않는다.이 고전적 관행의 고수가 심판의 권위와 맥락을 같이 하면서 오히려 스포츠의 번창을 유지해온 것으로 인식돼온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다.그러나 이제 상업주의가 팽배하고 승패에 이해관 계가 걸리면서 판정 하나하나가 이해타산의 민감한 대상이 돼버렸다.더구나 육안으로 극복하지 못하던 어떤 한계를 TV를 통해 미시의 세계,완급의 현장을 극명하게 풀어줌으로써 심판의 권위와 그 실체는중대한 도전을 받게 됐다.이제 스포츠 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에의해 지배되는 시대가 오고 있음을 예고라도 하듯 판정시비가 빈발하고 그 수습의 모양새는 점점 궁색해지고 있다.올 프로야구는아홉차례나 경기가 중단되는등 심판판정에 따른 갈등이 있었고 프로축구도 예외는 아니었 다.한국시리즈에서 눈에 띈 것은 심판배정및 그 자질과 운영의 미숙도 문제였지만 심판의 권위가 선수와팀 관계자들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헬멧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거친 행위나 관중석에서 날아오는 쓰레기,그라운드로 쇄도하는 몰지각한 작태등은 그 장면을 얼마나 많은 팬들과 어떤 계층의 눈들이 지켜보고 있는가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방자한 몸가짐들이었다.야구는 허허실실의 경기여서 심판에 대한 강한 항의나 빈볼을 던지는 것조차 작전의 일종이라고 할 지도 모른다.야구계 일각에 이러한 시각이 엄연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은 승리지상주의의 한 전형으로 주목된다.심판의 권위가 확립돼야 할 이유다.판정의 권위는 살리되 오심에 대해 응징하는 제도는 세련되지 못한 수용태세로 인해 아직도 뿌 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모두의 세련된 의식이 아쉽다.
(KOC위원.전 언론인) 김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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