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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10년차 최씨, 배추 12만 포기 갈아엎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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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농촌에 때아닌 수확물 갈아엎기가 진행되고 있다. 올해는 태풍 피해가 없었던 데다, 병충해가 적고 날씨까지 좋아 수확량이 크게 늘었다. 그러나 대풍년을 맞은 벌판에선 농민들의 한숨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여파로 수요가 급감해 가격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료와 기름값 등이 폭등하면서 농사비용은 급증했다. 농민들이 삼중고(三重苦)의 역설에 가로막힌 셈이다.

10년 만에 처음 1만여 평의 배추밭을 갈아엎는다는 전북 무주의 한 중상층 농가를 찾아갔다. 대풍년임에도 국내외 경제 여건과 농산물 유통의 문제가 밭농사 농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다음은 중앙 SUNDAY 전문.

올여름의 유가 급등과 최근의 금융위기로 서민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특히 가을 수확이 한창인 농민들은 농산물이라는 ‘실물’로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기름·사료·비료 값이 급등한 것만도 큰 고통인데, 수요가 뚝 떨어져 값이 바닥을 치고 있다. 빚 이자는 갈수록 오른다. 벼농사는 그나마 형편이 낫지만 밭농사만 짓는 농민은 대풍년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배·오이·무·배추 등의 수확을 포기하는 농민이 속출하고 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1만여 평의 배추밭을 갈아엎는다는 전북 무주의 한 중상층 농가를 찾아갔다. 대풍년임에도 국내외 경제 여건과 농산물 유통의 문제가 밭농사 농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특히 배가 산지에서 폐기되기는 올 해가 처음이다.

지난 15일 전북 무주군 무풍읍에서 농부 최연석씨가 배추밭을 갈아엎은 뒤 으깨진 배추포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귀농 10년차 ‘대졸 농부’다. 신동연 기자

“최악입니다. 이대로 2~3년만 더 가면 저는 물론 우리 농촌은 전부 망할 겁니다.”
지난 15일 오전 10시, 전북 무주군 무풍 읍내에서 산길을 따라 8㎞를 올라가니 3만9600㎡(1만2000평)의 넓은 배추밭이 나타났다. 튼실하게 자란 배추들이 널려 있었다. 대풍년의 현장 앞에서 배추밭 임자인 최연석(46)씨는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같이 오전 4시에 일어나 오후 9시까지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태풍도 없었고, 날씨도 좋아 올해처럼 농사가 잘되긴 처음인데….”
이날은 지난 8월 초 파종한 배추 12만 포기를 모두 갈아엎기로 한 날이다. 지난해보다 비료 값은 절반, 기름값은 배나 더 들었는데, 풍작 탓에 배추 값이 지난해의 절반 아래로 폭락했다. 수지타산을 맞추려면 평당 5000원 이상의 가격이 형성돼야 하지만 산지 수매 시세는 2000원에도 못 미친다.

수확을 하려면 인건비도 부담이다. 지난해 남자 한 명당 7만5000원이던 일당이 올해에는 8만원으로 올랐다. 1억8000만원이나 되는 빚도 골칫덩이다. 비료 값 등을 대느라 사채까지 끌어 쓴 탓에 1년 이자가 1800만원을 넘는다. 지난해 6%대이던 농협이자는 올해는 7%대로 뛰어올랐다. 그는 “경제위기가 가진 것 없는 농부를 가장 먼저 습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최씨는 그나마 다행인 경우다. 연초부터 농협과 계약재배를 했기 때문에 시세 조절을 위해 농협이 진행하고 있는 산지폐기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는 1만2000평 밭을 갈아엎고, 2000만원가량을 보전받기로 돼 있다. 산 아래 계약재배를 하지 않은 농가의 배추밭은 아예 누렇게 말라가고 있었다. 산지폐기 검증을 위해 나온 지역 농협의 강삼영 과장은 “계약재배 농가는 값이 급등할 때 그만큼 돈을 벌 수 없는 단점이 있지만 급락했을 때 최소한의 경비는 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최씨는 트랙터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잠시 뒤 ‘타다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진초록빛 배추 잎이 트랙터에 달린 로터리 칼날에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지름 1m의 대형 트랙터 앞 타이어 홈에는 배춧속이 노랗게 으깨져 묻어났다.

핸들을 잡은 최씨의 얼굴에 알 수 없는 웃음이 묻어났다. “자식 같은 배추를 갈아엎는데 어찌 기분이 좋겠어요. 워낙 허탈하니 웃음만 나올 뿐이죠.” 입 꼬리는 분명 웃고 있는데, 흰자위가 붉어지더니 눈시울이 조금씩 젖어 들었다.

최씨는 성균관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학사 농사꾼’이다. 동남아와 중국 등지를 오가며 오퍼상을 했다. 운이 없었다. 일이 손에 익을 무렵 외환위기가 터졌다. 이듬해 빚만 안은 채 고향 무주로 돌아왔다. 고향집 뒷산 비탈을 개간해 배추농사를 시작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2년 만에 1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해 매출은 사상 최고인 1억5000만원을 기록했다. 최씨는 “그래 봐야 대출이자와 비료 값 등 각종 비용을 제하면 순익이 3000만원밖에 안 되지만 그것도 농촌에서는 큰 수입”이라고 말했다.

최씨에게 가장 큰 위협은 중국이다. 국내 식당 김치의 70%를 차지하는 중국배추 때문에 국내 배추 수요가 크게 줄었다. 조금만 풍년이 들어도 배추 값이 폭락하는 가장 큰 원인이 중국이라는 것이 최씨의 해석이다. 최근 논란이 된 쌀 직불금 문제를 물어봤다. 그는 “농촌이 이렇게 힘든 지경인데, 높은 양반들이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고 답했다.

농촌경제연구원 신용광 박사는 “무ㆍ배추 등은 기본적으로 날씨에 따라 작황이 좌지우지되는 품목”이라면서도 “정부나 연구기관에서 생산량 예측을 통한 농가정보를 더 자세히, 신속하게 제공하고, 계약재배를 더 늘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최씨는 “전문가의 진단도 좋지만 농민들이 현장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농정이 나왔으면 좋겠다”며 “특히 농산물 유통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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