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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솔직한 독설 때문에… 클린턴 행정부 입각 좌절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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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호 14면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프린스턴대 폴 크루그먼(55) 교수는 (작고한 밀턴 프리드먼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사람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신무역 이론과 경제지리학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받은 폴 크루그먼

그를 세상에 알린 것은 칼럼이다. 2000년부터 일주일에 두 번 뉴욕 타임스에 써 온 그의 칼럼은 일품이었다. 필자도 예리한 분석과 설득력에 이끌려 한동안 그의 칼럼을 애독했다. 그것이 지나치게 파당적으로 변질되기 전까지는.

칼럼니스트로서 그가 이름(보수 쪽에는 ‘악명’, 진보 쪽에는 ‘명성’)을 날린 것은 끈질긴 ‘부시 때리기’를 통해서다. ‘부시의 저격수’란 게 순화된 표현이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부시와 그 주변 인물들, 소위 네오콘(미국의 신보수주의자)은 모든 경제·사회적, 나아가 국제적 ‘악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시 행정부가 감세 조치를 취하면 “감세를 하면 일자리는 늘지 않고 재정적자만 늘어난다. 부자만 이롭다”고 물고 늘어졌다. 이라크 전쟁이 터진 후에는 “네오콘이 정보를 조작해 국민을 전쟁터로 내몰았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는 감세가 민간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많은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네오콘에 대한 끝없는 분노가 경제에 관한 냉철한 눈을 가려 버린 것이다.

참다 못한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2003년 11월 기사를 통해 “그의 칼럼을 훑어보면 세상의 온갖 병폐를 조지 부시에게 돌리는 경향을 드러낸다.…그의 경제학이라는 것도 때로는 너무 잡아 늘여진다. 그 결과 크루그먼의 개인적인 정치적 신념이 마치 경제이론에서 실증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는 환상을 독자에게 심어 줄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이와 관련해 우려되는 국내 현상 중 하나는 이번 크루그먼의 노벨상 수상을 신자유주의의 패배 내지 ‘큰 정부’의 승리로 치부하는 분위기다. 크루그먼의 노벨상과 최근 금융위기를 연계하며 ‘프리드먼은 죽고 케인스가 부활했다’ ‘이제 작은 정부는 끝났고 큰 정부가 도래했다’ ‘이명박 정부가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은 이런 흐름에 역행한다’는 아전인수 격 주장을 펴기 일쑤다. 외국 유수 언론에서 그런 현상은 포착되지 않는다.

과격한 크루그먼에게는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도 성에 차지 않는다. 너무 말랑말랑하다는 게다. 사회통합 속에서 변화를 꾀하는 듯한 오바마에게 “우리에게는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는 아이젠하워가 아니라 (반대를 무릅쓰고 뉴딜을 추진한) 루스벨트가 필요하다”며 진보적 이념으로 무장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가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 데는 뉴욕 타임스의 칼럼 외에도 고비 때마다 내놓은 ‘위기의 예언’도 큰 몫을 했다. 그는 지지자 사이에서는 ‘위대한 폭로자’, 비판자 사이에서는 ‘재앙의 예언자’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의 달러화 폭락, 최근의 금융위기 등 그의 많은 예언 가운데 아시아 외환위기에 관한 것이 크게 주목 받았다. 동아시아가 고속 성장하던 94년 포린 어페어스지의 ‘아시아 기적이라는 신화’라는 기고문을 통해 “아시아의 성장은 노동과 자본 등 생산요소를 많이 들인 결과일 뿐 효율성 제고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아시아의 생산성 제고 노력을 촉구한 그의 글은 97년 동아시아에 외환위기가 터지자 위기를 예언한 것으로 승격되었다.

이들 대형 재앙은 대부분 자기실현(自己實現)적이다. 경제가 불안할 때 저명 인사들이 ‘위기, 위기…’ 하다 보면 실제 상황도 위기로 치닫게 된다는 얘기다. 크루그먼이 최근의 금융위기와 관련해 장기적 침체, 적어도 2010년까지 대공황만큼은 아니더라도 극심한 침체가 이어질 것이란 예고를 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크루그먼의 노벨상은 오래전부터 점쳐졌다. 이미 91년에 존 베이츠 클라크상을 받은 그였다. 미국경제학회가 40세 미만의 경제학자에게 주는 이 상은 노벨상의 전 단계로 알려져 있다. 크루그먼 자신도 노벨상 수상 전부터 “언제 노벨상을 받나 기대하고 있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그가 칼럼으로 당파성을 드러낼수록 노벨상 수상 기회는 멀어지는 듯했다. 경제학 발전에 그의 기여를 평가하는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했다.

그의 당파성과 독설은 출세길도 막았다. 93년 자기에게 중책을 맡기려는 클린턴 당선자를 만나기 위해 아칸소까지 날아갔으나 크루그먼의 ‘솔직함’이 입각에 장애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 스스로도 하마평이 돌 때마다 “나는 성격상 그런 역할에 적합하지 않다. 사람을 잘 다루어야 하는데, 나는 엉뚱한 얘기를 꾹 참지 못한다”고 토로할 정도다.

세상이 변했는지, 노벨위원회의 편견이 발동했음인지(노벨위원회는 정치적 결정을 내린다는, 특히 거대 미국의 영향력에 놓여 있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깜’이 되지 않는 인물에게 상을 준다는 편견에 시달려 왔다), 아니면 최근의 미국발 금융위기 때문인지(규제에 얽매여 저성장해 왔던 유럽인은 미국의 자유로운 시장경제와 광범위한 규제 완화, 그에 따른 활력경제에 늘 열등감을 지녀 왔다) 그런 크루그만이 노벨상을 받게 된 것이다.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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