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리뷰>영화 "율리시즈의 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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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반성이 아니라 이건 밀고다.테오 앙겔로풀로스감독은 인류의 기대를 배신하는 역사의 비애를 우리에게 몰래 이른다.보라.영화감독 A가 찾는 것은 마나키아형제가 찍어놓은 필름 세 통.이건 감독의 화두다.세기초의 필름을 세기말에 찾아다니는 여정을 핑계삼아 영화는 민족주의로 가장한 인종이기주의의 결과를 하나하나,노골적으로,지루하리만큼 느리게 훑어나간다.
그리스.알바니아.부쿠레슈티.베오그라드.사라예보의 황폐한 표정이 그 시선에 포착된다.포착? 아니다.우린 보지 못했다.
마나키아가 발칸반도를 횡단하며 필름에 담아놓은 세계도,최초의시선도,혹은 블라디미르가 꿈꾸었던 평등한 인민의 세상이나,마침내 이보 레비의 딸 나오미가 죽는 순간마저도 목격하지 못했다.
안개 낀 미래의 저 어두운 풍경만을 보았을 뿐이 다.이 얼마나무력한 시선인가.
플로베르의 친구는 임종 앞에서 절규했다.『창문을 닫아줘,너무나 아름다워.』까뮈는 그를 추억하며 이렇게 말했다.『시간이 흐르면 세상은 늘 모든 것을 완고하게 정복해버린다.세상은 늘 옳다.』사라예보에서라면 이 말은 달라질 것이다.세상의 참혹 한 모습에 우린 창문을 닫아달라고 애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죽고 난 이후에도 지상의 나날은 계속될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늘 옳다.
그 세상에서 만난 두 사람,아버지와 여인이 내 눈속을 아프게파고든다.
눈으로 뒤덮인 천지를 향해 비스켓을 던지는 택시기사,가족들과춤을 추면서 새해 첫날을 뜬 눈으로 맞이하고 흥겹게 신년을 축하하는 아버지,필름현상에 성공한 뒤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다 딸과함께 안개 낀 축제의 강변에서 죽음을 맞는 필 름수집가 이보 레비,연인의 시신 앞에서 짐승처럼 우짖는 영화감독,즉 세상의 모든 아버지.그리고 A의 과거의 애인,국경을 넘으려는 할머니,마나키아 박물관의 여인,기차역에서 만난 어머니,밤배를 태워준 과부,진흙과 먼지의 땅을 떠나고 싶 어하는 나오미,즉 세상의 모든 여인.
이들은 육체가 간직한 어떤 체험의 구체성을 환기시킴으로써 우리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며 애인이 된다.특히 그녀,동일한한 여성은 영화에서 1인4역으로 부단히 갱생한다.
그건 결말의 참혹한 처형을 위한 「다시 삶」이다.그녀가 자꾸프레임 안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바로 그 죽음을 위해서다.
가슴아프다.응시할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 들끓는 것은 저 잔인한 음향과 분노(Sound and Fury)이니.
(영화평론가) 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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