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경제 상황 나빠 환경에 돈 쓸 여유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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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우리 기업들은 환경 정책에 돈을 쓸 여유가 없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15일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담에 앞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금융위기로 상황이 너무 좋지 않기 때문에 EU의 환경 계획에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라도슬로 지코르스키 폴란드 대통령 역시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입장을 지지했다. 금융위기와 경기 침체 등으로 경제 사정이 악화되면서 최근 활발하게 추진된 유럽의 친환경 정책이 뒷걸음질 칠 조짐이다. “당장 먹고살기 어려우니 환경 문제는 일단 보류하자”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은 환경 문제를 선도한 환경 선진국이라는 점에서 세계 각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EU 순회 의장국인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7월 환경-에너지 조약을 제안했다. 주요 내용은 2020년까지 이산화탄소(CO₂) 배출을 1990년 수준의 80% 수준으로 낮추고, 재생 에너지 사용 비율은 20% 선까지 끌어올리자는 것 등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EU 27개국이 합의해 내년에 열리는 코펜하겐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회의에서 다른 나라들을 압박하자고 했다. 코펜하겐 회의는 2012년 종료하는 교토의정서의 후속 체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다.

그러나 지난달 열린 EU 환경 관련 회의 때부터 달라진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경제지 레제코에 따르면 당시 회의를 마친 참석자는 “회의 분위기가 최근 몇 달 새 확 변했다”고 전했다. 몇몇 나라가 “환경조약 준수를 위해서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기업 활동을 위축시킨다”며 반대한 것이다.

AFP통신은 환경 조약대로라면 유럽의 기업은 2013∼2020년까지 CO₂ 감축을 위해 440억 유로(약 74조8000억원)를 써야 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이유로 세계 최고의 환경 선진국 독일 역시 미온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독일은 지난달 경제·환경장관 등이 모인 자리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각부 장관은 재생에너지 및 탄소배출권 사용 규정 완화를 건의했다. CO₂ 규제 강화는 결국 대기업 공장의 해외 이전을 가속화해 일자리 감소와 기업 부담 가중 등을 불러온다는 이유였다.

최근 유럽의 경제연구소들은 내년에 경기 침체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때문에 당분간 유럽의 정책에서 환경 문제가 최우선 순위에 오르기는 힘들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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