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코지, 유럽 경제대통령 역할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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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합의안 도출을 주도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파리 AFP=연합뉴스]

 “1982년부터 유럽연합(EU) 일을 했지만 이번처럼 응집력을 발휘한 건 처음 본다.”

유럽의 금융위기 대책안이 발표된 직후 장 클로드 융커 룩셈부르크 총리 겸 EU 금융장관이 한 말이다. 주요 사안마다 번번이 각국 의견이 갈려 최종 결정을 하지 못했던 EU가 ‘10·12 엘리제 합의안’을 계기로 한껏 고무된 표정이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유럽 각국의 위기 해법이 엇갈리면서 하나의 합의안을 내놓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각국의 이견을 조율한 사람은 EU 순회의장국인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었다.

프랑스 언론은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가 유럽의 경제장관이었다면 사르코지는 유럽의 대통령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사르코지의 위기 관리 리더십은 지난달 말부터 발휘됐다. 미국 정부의 7000억 달러 구제금융안이 하원에서 부결된 직후 유럽 정상회의를 제안했다. 세계가 미국만 바라보던 상황에서 사르코지는 유럽이 대안이 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유럽 각국의 개별적인 처방으로는 이번 위기에서 약효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유로존 정상회담이었다. 이때 사르코지는 유로존이 아니지만 영국의 브라운 총리도 초청했다. “영국은 유로존 국가가 아니지만 전 유럽의 일사불란한 대응에 힘을 크게 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러고는 브라운에게 브리핑 기회를 줬다. 경제 전문가인 브라운은 은행 간 지급 보증의 필요성을 설명했고, 더 이상 합의를 미룰 경우 세계가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브리핑 내용은 사르코지와 사전에 만나 조율한 것이었다.

한 정치 평론가는 “이번 합의안은 사실상 사르코지와 브라운의 합작품”이라며 “과거 시라크와 블레어가 으르렁대던 구조였다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르코지의 실용주의가 낳은 산물이라는 설명이다. 당초 사르코지는 브라운이 제시한 ‘은행에 정부 지원금을 주고 은행 간 대출을 보장하자는 안’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8일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이후 사흘간 증시 폭락 등이 이어지면서 다른 선택이 없다는 판단 아래 입장을 바꿔 브라운의 제안을 사실상 단일안으로 지지했다. 이렇게 되면서 프랑스와 함께 반대 입장이던 독일도 설득할 수 있었다.

◆정치 통합도 가속화할까=이번 합의안을 계기로 유럽에서는 정치 통합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EU 정치 통합의 가장 큰 숙제는 리스본 조약의 부활이다. 리스본 조약은 6월 아일랜드의 국민 투표에서 부결된 뒤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유럽은 이번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각국 정부를 일사불란하게 조율할 수 있는 ‘하나의 유럽’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리스본 조약의 핵심 내용 가운데 하나인 EU 대통령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통합에 적극적인 프랑스·독일·영국 정부의 발언권이 커졌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 부결된 동의안을 어떤 방식으로 살려낼지는 여전히 고민거리다. 또 2009년 1월부터 의장국에 오르는 체코가 리스본 조약에 소극적이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그래서 사르코지는 올해 안에 상당수 회원국들의 합의를 이끌어내겠다는 계획이다.

전진배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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