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나나미와의대화>3.지도자는 리스크를 책임지는 존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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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시오노 나나미를 처음 만난 날 나는 그에게 내쪽은 입을 대체로 닫고 있고 그 사람 혼자 생각나는대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형식으로 대담을 진행시키자고 제의했다.그는 매우 난처하다면서 대답했다. 『지금 제 머리 속은 「로마인 이야기」 제6권을 어떻게 쓸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제6권의 주인공은 제5권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옥타비아누스입니다.이 사람의 이야기를쓰는 목적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와 같습니다.그러나 그 접근방법은 다릅니다.정반대라고 해야 할만큼 다릅니다.제4,5권의 주인공인 카이사르의 경우 갈리아전쟁을 치르는 것이 이야기의 큰 줄거리가 됩니다.그런데 옥타비아누스의 경우 전쟁도 그다지 없고요.이렇게 돼 있으니 여간 고민이 아닙니다 .이것이 지금 제 머리 속에 꽉 차있는 참이라 이야기를 이쪽 혼자 자발적으로 풀어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같군요.』 시오노의 이 고민을 듣고있는 사이에 나는 여성이야말로 작가가 갖춰야 할 필요조건을 선천적으로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하나의 작품을 쓰는 것에 관련되는 모든 단계,즉 그 작품을 잉태할때 치르는 방랑하는 수컷같은 영감(靈感)과 자신의 암컷같은 경험 사이의 동침(同寢),오랜 회임(懷妊)기간중의 인내.희망.근신(謹身),출산의 고통과 그 다음 잠시동안의 희열(喜悅),태어난 아이가 커가는 것을 뒷바라지하고 바라보는 근심.이 모든 단계를 가 장 격렬하게,그리고 가장 성공적으로 겪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작가의 조건이리라.이 모든 과정은 영락없이 여성적이다.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지금 옥타비아누스,즉 로마제국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나는 한편으로는 아주 나쁜 때,또 한편으로는 아주 좋은 때 이 여자를 만나고 있다.그는 『로마인 이야기』제5권 끝에 이렇게 썼다. 『평화는 원하고 부르짖는 것만으로는 실현되지 않는다.기원전 44년 3월15일 카이사르의 육신은 죽었다.그러나 카이사르가 정말로 죽은 것은 기원전 30년이었다.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카이사르가 타도한 (회고주의적)공화정 로마 를 대신하는 제정(帝政)로마가 (이 해에)시작됐기 때문이다.』 시오노가 아우구스투스,즉 옥타비아누스를 쓰려는 목적이 카이사르를 쓴 목적과 같다고 말했을 때의 목적이란 무엇일까.다름 아니라 고대 로마를 장식한 천재적 지도자를 그리는 것이다.각각 다른 고대 로마의 여러 지도자상을 그려보겠다는 것 이야말로 작가 시오노에게 지금까지,그리고 자기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기에 앞으로도 계속 써 출간하겠다는 『로마인 이야기』를 끊임없이 잉태하는동기일 것이다.
지도자는 무엇을 하는 존재입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시오노는 기다렸다는듯 즉시 대답한다.
『리스크를 지는 존재입니다.』 질문이 복잡한 것일수록 그 대답의 첫마디를 웅변식으로 일단 끊는 재주를 이 사람은 자주 구사한다.그리고 나서 그는 말을 계속한다.
『한 시대는 그 시대의 리스크가 있습니다.지도자는 그것을 파악합니다.그리고 가능한데까지 그것을 축소합니다.아무리 해도 처리할 수 없는 나머지 리스크는 자신이 직접 집니다.이것이 지도자가 하는 일입니다.』 이 대담의 녹음을 들어보면서 내가 알게된 것은 시오노가 군데군데서 「지도자」라는 단어와 「리스크」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리스크를 파악하는 것과 축소하는 것은 지도자의 필수조건중 하나인 지혜다.그래도 남으면 그 남는 부분을 직접 지는 것은 더욱 필수적 조건인 용기다.재미있는 것은 지도자가 리스크에 대해가진 지혜와 용기가 크면 클수록 그 구성원들이 자진해 그 리스크를 함께 지는데 동참한다는 사실이다.이런 지도자의 대표적 예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시오노의 말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저를 비(非)민주주의적이라고 비판합니다.고대 로마의 공화정시대를 끝나게 하고 제정시대를 연 카이사르를 제가 찬양하기 때문이겠지요.그러나 이런 비판은 제게 부당합니다.제가 하는 것은 그 당시는 이러이러했다고 묘사하는 것입 니다.지금 세상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카이사르는 그 당시의 지도자입니다.초기에 비해 수백배로 영역과 인구가 커진 로마를 그전처럼 원로원이 이끄는 회고적 귀족 공화정치로는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카이사르는 이런 로마의 리스크를 파악했고 그것을 처리했고,또 스스로 감당했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시오노는 이야기를 한번 시작만 하면 지칠줄 모르는 사람인 듯하다.『로마인 이야기』제6권을 쓸 일이 머리 속에 고민거리로 꽉 차있기 때문에 자기 혼자 이야기를 풀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다소 실망스러워하는 나에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어차피 크리에이터(작가)란 무언가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존재니까요』라고자기를 조금 설명했던 것이 생각났 다.이 말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만은 아니었다는 것도 차츰 분명해져 갔다.
시오노는 『로마인 이야기』제1권 서문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쓰고 있다.
『옛날 로마에는 수많은 신들이 살고 있었습니다.많을 때는 그수가 30만을 헤아렸다고 하니 일신교를 믿는 분이라면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자기는 어떤 당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옛날 일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반드시 말 그대로는 아닌 것같다.그는 일신교에 대해 무섭게 비판적이다.다신교에는 책임지고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해줄 유일신이 없기 때문에 별수 없이 인간과,인간이 만드는 제도가 책임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그리고 죄과를 용서할 신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 관용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로마문명이 관용의 문명이 된 것은 다신교를 믿었던 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시오노를 비민주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없을지 모른다.그러나 그는 일신교 신봉을 거부하듯 민주주의도 신봉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말한다.아마 두가지 이유가 겹쳐있을 것이다.그 하나는 그가 독재자 카이사르의 정치와 군사에 너무 심취해 있기 때문일 것이고다른 하나는 현대 일본과 이탈리아의 민주주의에 너무도 실망하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원해줄 唯一神 없어 그는 말한다.
『사람에게 번영과 평화와 문명을 가져다 줄 수만 있다면 정체(政體)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저는 봅니다.카이사르 시대에는 카이사르의 독재가 이 목적을 가장 잘 수행한 정체였음은 분명합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그러나 나는 민주주의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시오노의 생각에 동조할 수 없었다.시오노는 자기가 노예로 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진정으로 고대 로마인이기를 바란다고 했다.시오노의 이 말은 논리가 취약하다.노예제 도는 그것이 민주주의에 모순되기 때문에 피나는 투쟁에 의해 사라졌다는 사실을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은 가슴에 새겨두고 감사할 일이다.
로마에서 강위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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