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況을산다>2.불황의 정신병리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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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우리는 역사이래 가난에 쫓겨,외침에 쫓겨,그리고 부패관료의 약탈에 쫓겨 겨우 목숨만 부지해왔다.핫바지니 엽전이니 하는 자조와 함께 좌절과 회의로 젖은 우울한 세월을 살아왔다.참으로 한맺힌 암울의 세월이었다.그러나 우리는 굴하지 않 았다.겉으론지면서 속으로는 「언젠가」를 별러왔었다.이윽고 60년대의 「잘살아 보자」는 구호는 한맺힌 백성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침식을잊은 채 열심히 일했다.죽어라고 일했다.
「한강의 기적」이 서서히 용틀임하기 시작했다.70년대에 이미「신흥졸부」라는 새로운 이름이 등장했다.그후 줄곧 우리는 고도성장가도를 달려왔다.풀죽었던 민족 자긍심이 되살아났다.패배와 열등감이 「하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바뀌어갔다.
여기까진 좋았다.문제는 여기서 우린 그만 우쭐해지기 시작한 것이다.모두가 재벌이나 된듯 씀씀이가 헤퍼지기 시작했다.분수를잊고 그만 들뜨기 시작했다.오죽했으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외국인들이 비아냥거렸을까.겨우 그것도 부(富)라고 우린 그만 제정신을 잃고만 것이다.
우린 헐벗고 굶주린데는 익숙해있다.오랜 세월을 용케도 잘 견뎌왔다.한데 풍요를 관리하기에는 미숙하다.유사이래 한번도 잘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흥청망청 모두가 졸부 심리에 들떠있다.과소비.사치.허영을 새삼 들먹이고 싶진 않다 .
정신병중에 조울증이란 게 있다.괜히 기분이 좋아 들떠있는 조증(躁症)기와 울증기가 번갈아 오는 정신병이다.양극단을 오간다고 해서 최근엔 양극성(兩極性)장애라고 한다.우리는 긴 우울기를 지나 지금은 조울증의 조증기 경과중에 있다.아 주 입원치료를 할만큼 중증이다.이대로 두었다간 집안살림 거덜난다.
가난에 시달려온 노장세대는 한풀이로 써 젖힌다.자랑도 하고싶고 현시욕.과시욕도 작용한다.중년세대는 당연한 듯이 쓰고 젊은세대는 제왕의식에 젖어 쓴다.쓰다 모자라면 몇이 모여 데모만 하면 정부도 기업도 어떤 조직도 그 등등한 기세 에 눌려 요구대로 들어준다.겨우 쌓아온 걸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소심증이 원칙없는 억지에 굴복하고 만다.
그러고 어물쩍하는 사이 어느새 나쁜 것이라곤 다 갖춘 4고(高)니 5고니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무역적자,산업공동화에 이윽고 감원선풍,말만 들어도 끔찍하다.
기업은 이미 불황에 대비해 비상대책을 강구중이지만 일반 국민은 전혀 심각하지 않다.아직도 조증상태라 상승기류를 타고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
조증환자에겐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온통 세상이 장미빛인데 걱정할 겨를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조금만 냉정하면 불황의 바닥이 보인다.경제전문가의 진단이 달리 필요하지 않다.사치와 허영에 넘어간 로마,인기에만 급급하다 파산한 남미가 오늘의 우리와 다른게 뭔가.이대로 가다간 어떻게 될 것인가.건전한 상식을가진 사람이라면 앞이 보인다.하지만 우린 애써 외면한다.가는데까지 가보자는 거다.이게 우리의 극단심리다.
정부도 기업도 요즘은 2000년대 청사진을 거둬들였다.세계 몇위니 하는 그 거창한 구호들이 국민들의 조증에 불을 질렀다는걸 이제야 자각한 모양이다.그나마 다행이지만 국민들의 급성기 조증을 치료하기엔 역부족이다.
기업의 비상대책도 괜히 하는 엄살로 치부한다.명예퇴직이라지만사실은 감원당한 40대 초반의 한 샐러리맨은 퇴직금으로 가족과함께 세계여행을 떠났다.설마하니 내게 일자리가 없을라고,여행이나 하고 돌아오면 무슨 수가 나겠지.이게 배짱 인지,한국적 낙천주의인지,아니면 조증 증상인지 진단이 어렵다.어쩌자는 건지 나로선 처방이 없다.
조증이 치료되지 않는 한 불황은 오게 돼있다.이렇게 쓰고도 빚을 안진다는게 이상하다.이 치료를 위해서도 불황은 와야 하는지도 모른다.가는데까지 가 보자는 사람들에게도 교훈이 될 것이다. 한가지 걱정이라면 오늘의 세대는 태어난뒤 한번도 가난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1천년을 지켜온 조상들의 가난에의 슬기가 계승되지 못한 것이다.그렇다고 풍요를 슬기롭게 관리할 능력도 없고.하지만 지금도 늦지않다.처방은 한가지.주어진 일 열심히 하고 분수를 지켜 사는 일이다.
이시형 강북삼성병원.사회정신건강硏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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