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칼럼] 중국과 새로운 세력균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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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의 마지막 수퍼파워 경쟁국이었던 소련은 1991년 붕괴됐다. 하지만 군사적 역량과 별개로 소련은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80년대 말 일본이 제조업 분야에서 미국과 주도권 쟁탈을 벌일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후 10년 동안 일본은 경쟁력을 상실했다. 중국은 다극 세계의 일원으로 강국의 대열에 오르기를 바랐지만 힘의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힘을 키워가는 유럽연합(EU)은 막강한 미국의 영향력에 맞설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본다.

경제 성과 측면에서 EU는 미국과 대등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EU는 역내 위기나 국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방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이런 시스템은 어떤 파워가 있으며, 미국의 시스템과 비교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지금 미국에선 유일 패권 또는 이익을 공유하는 다극 세계 중 어떤 전략이 장점이 많은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 시스템은 유지 비용이 덜 들 수 있지만 이라크 전쟁 때처럼 미국이 그른 정책을 채택할 수 있어 국제사회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미국엔 확실히 9·11 테러 사건을 일으킨 테러리스트들을 징벌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한다고 해서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거나 9·11 테러와 연계됐다는 비틀린 선입견에 기초해 독재국가를 공격하거나 그 정부를 전복시키는 결정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반대했던 프랑스와 독일은 미국과 좋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 전쟁에 대한 입장은 변함이 없다. 유럽의 사활적인 이해 지역인 중동은 전쟁의 결과로 더 불안정해지고 있다.

신속대응군과 다양한 치안기구뿐 아니라 유럽 안보방위 구상(ESDP)으로 구체화된 독자적인 유럽 방위 개념은 다극 세계에서 필수적이고 효과적인 시스템이라고 중국은 판단하고 있다. 중국은 대부분의 안보 사안에서 유럽 안보방위 구상이 미국의 안보 전략을 모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EU와 미국은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 가치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많은 EU 국가들은 창설 이래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국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ESDP가 미국의 선례를 따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특히 이라크전처럼 미국의 정책이 국제법의 상궤를 벗어난다면 더욱 그렇다.

중국은 유럽의 이런 확대된 안보 역할을 환영한다. ESDP의 구성 요소와 패턴은 몇 가지 이유로 중국의 관심을 끌 만했다. 우선 중국 지도부는 ESDP가 각종 작전에 합법성을 부여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지금까지 모든 ESDP의 임무는 국제법뿐 아니라 정부 간 조정 결과를 존중했다. 대부분의 군사·치안 활동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기초했고, 비유럽 지역에서의 작전은 당사국의 동의 아래 수행됐다. 물론 ESDP의 안보 활동은 유엔과 별개로 움직일 수 있고 꼭 안보리의 인가를 받을 필요는 없다.

다음으로 ESDP는 적절한 통치권과 합법성을 중시한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ESDP의 활동은 정권교체보다는 그 국가의 통치력을 제고하는 데 집중된다. EU는 안보 환경을 향상시키려는 국가들의 노력을 지원해 왔다. 마지막으로 ESDP는 유엔이나 아세안·아프리카연합 같은 지역 기구와 사안별로 협력하는 등 개방적이다.

중국이 지속적으로 독자적인 유럽 안보 체제를 지지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좋은 이유가 있다. ESDP는 대만 문제 같은 중국 내정 현안에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유럽이 강력하고 독자적이기를 바란다. 여러 측면에서 이제 중국은 진정한 다극 체제를 구상할 만한 시점이 됐다.

선딩리 중국 푸단(復旦)대학 국제문제연구원 상무부원장
정리= 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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