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항일운동 프랑스 신부들이 박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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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일제치하 독실한 천주교신자였던 안중근(安重根.세례명 도마).
안명근(安明根.세례명 야고보)두 의사(義士)의 항일독립운동은 당시 조선 천주교를 이끌던 프랑스인 신부들에 의해 철저히 배척당했음이 드러났다.
1909년 10월 일제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그 무렵 천주교 제8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한국명 閔德孝.1854~1933)주교는 이를『증오할 만한 살인행위』로 단정해 安의사의 마지 막 성사(聖事)를 끝까지 방해했다.
또 그는 安의사의 유해를 일본경찰이 가족에게 넘겨주지 않으려는 처사에 대해서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같은 사실은 1993년 한국 천주교가 안중근 의사를 천주교신도로 공식 복권시켰을 당시에 일부 밝혀졌으나,23일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崔奭祐 신부)가 『뮈텔 주교 일기』(1890년 8월4일~1932년 12월31일)를 1912년도분 까지 번역.
공개함에 따라 그 내막이 자세히 알려지게 됐다.
일기 내용중 安의사 관련 주요 부분만 시간대별로 엮으면 다음과 같다.
▶1909년 10월26일-『이토 공(公)의 이번 암살은 공공의 불행으로 증오를 일으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모습은 일본인들이나 몇몇 친일파 조선인들에게만 보인다.이토 공이 조선에 가져다준 그 모든 공적과 실질적인 이익까지도 조선을 억압하려는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다.그의 암살은 정당한 복수로 여겨져모두가 기뻐하고 있다.』 ▶1910년 2월14일-『안 도마(안중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며 신부 한명을 보내달라는 전보가왔다.』 ▶3월4일-『빌렘 신부로부터 뤼순(旅順)으로 보내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가 또 왔다.전제조건으로 안중근이 이토를 오해하고 죽이게 된 것을 먼저 뉘우칠 것을 요구하는 회신을 보냈다.이 편지를 부치자마자 빌렘 신부가 그저께 뤼순으로 떠 났다는 경찰의 보고소식을 들었다.』 ▶3월15일-『빌렘 신부가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2개월 동안 미사 집전을 중지시키는 징계장을 부득이 보내야 했다.』 ▶3월28일-『안 도마(안중근)의 사형이 28일에 집행됐다.일본인들이 그 유해를 가족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한다.극히 당연한 일이다.』 한편 『뮈텔주교 일기』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인 안명근 의사가 1911년 1월 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 모집차 국내에 잠입했을 때 일본경찰에 잡히게 된 것도 빌렘 신부의 보고를 받은 뮈텔 주교가 이 사실을 총독부 고위당국자에게 밀고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미사집전을 중지당한 빌렘 신부가 뮈텔 주교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안명근 관련 중요 정보를 주교에게 일러바친 것이다.뮈텔 주교는 1911년 1월11일자 일기에서 『빌렘 신부가 총독부에 대한 조선인들의 음모가 있었는데 거기에 안 야고보(안명근)가 적극 관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빌렘 신부의 요청에 따라 나는 그 사실을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총독부 경무총감)장군에게 알리고자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데도 그를 찾아갔다』며 밀고 사실을 밝히고 있다.
뮈텔 주교는 밀고의 대가로 일본측이 재판에 계류중인 진고개로의 도로 개통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했으며,일제는 이 요구를 즉각 수용하면서 1월13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총독과 아카시 총감 이름으로 비밀정보를 알 려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뮈텔 주교에게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안천(安天.서울교대)교수는 『일제 치하 프랑스인 신부들이 선교활동에만 치중한 나머지 우리 민족의 시대적 아픔과 독립운동에냉담한 태도를 취한 사실이 이번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다시금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동현 현대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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