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새벽 네시에 퇴근한 구실장은 여느 때처럼 아침 아홉시에 출근했다. 밝은 표정으로 기민하게 일했고,을희에게도 전처럼 공손히대했다.밤 사이 을희에 의해 육신의 탈피를 한 남자같지는 않았다.안도의 숨을 내리쉬는 한편으로 놀랐다.
이런 경우 여자라면 어떤 태도를 보일까.
굳이 「여자」라고 범위를 넓힐 필요는 없다.을희 자신이라면 어떻게 처신할까,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아마도 온종일 심각한심신의 동요를 감추지 못할 것이다.
남자에 의해 수태(受胎)되는 여자의 피동적인 생태가 불안을 빚어내는 것일까.
이 생태적인 남녀의 차이가 「질적인 남녀평등」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원인의 하나인지도 모른다.태양처럼 눈부신 옛 여왕의 시대는 그래서 막을 내린 것인가.
모권시대의 남자들은 여자의 부름을 받고 규방 나들이를 했다.
체력이나 지략에 두루 뛰어난 우수한 남자가 그 첫 대상이 됐음은 물론이다.그들은 여성 권력자에게 자기 아이를 수태케 함으로써 자신의 혈통으로 권력을 잇게 했다.
권력은 부(富)를 낳았고,축적된 그 재산이 부권시대를 불러들인 바탕이 됐다는 학설의 근거는 여기에 있는가….
을희는 내내 흔들리고 있었다.
한 구성체의 책임자가 그 구성원의 하나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에 가슴 에는 죄책감을 느꼈다.동시에 쾌감의 여진(餘震)이 육신을 긴장시키곤 했다.
감정의 파도 위에 「도서출판 아사달」의 첫 작품이 출범했다.
『소서노여대왕의 수수께끼』.
한국사의 쟁점에 대담하게 메스를 넣은 이 책은 첫선을 뵌지 열흘만에 재판을,곧이어 삼판.사판을 내리 찍었다.
신나는 스타트에 좁은 사무실은 축제 분위기로 물들었다.
『불고기 파티라도 열어 주는 것이 어떨까요?』 날마다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영업담당 사원과 그새 교정 보따리를 집에까지 들고가 일해온 편집담당 여직원에 대한 위로겸 자축의 밤을 갖자고 구실장이 제안했다.
『마침 그럴 생각이었어요.고일호교수께서 수고해준 우리 직원들에게 감사의 저녁을 내겠다고 하셔서 제가 모신다 했지요.구실장이 알아서 푸짐한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해 주세요.』 구실장 얼굴에 잠시 그늘이 스쳤다.책의 저자인 고교수에게 그는 착잡한 콤플렉스를 느끼는 듯했다.
날개 돋친듯 팔리는 책의 집필자를 깍듯이 모셔야하는 일방 일마다 의견이 어긋나는 대립구도를 그 자신도 몹시 부담스러워하는눈치였다.
글 이영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