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미국의 '인권 이중 잣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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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리처드 마이어스 미 합참의장은 지난 2일 하루 종일 바빴다. 그는 여러 방송에 출연해 이라크 포로들에게 잔혹행위를 저지른 미군을 변호했다. "통탄스럽고 섬뜩한 행위"라면서도 "이라크 저항세력은 훨씬 더 나쁜 짓을 한다. 무고한 시민과 어린이들을 죽일 때마다 기뻐한다"고 강조했다.

군 최고 사령관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이라크 포로들이 그처럼 대우받은 것에 대한 '깊은 혐오'를 공감한다"고 짤막하게 유감을 표시한 뒤 침묵하고 있다. 언론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미군의 행위를 재차 비난하거나 개선조치를 발표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부시 행정부가 느낄 당혹감은 이해가 간다. 이라크 침공 명분으로 삼았던 대량살상무기가 없는 것으로 밝혀져도, 9.11 테러를 저지른 오사마 빈 라덴과 이라크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도 부시 대통령이 큰소리 칠 수 있던 배경은 미군 때문이었다.

"우리 아들 딸들이 이라크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고 있다. 감히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겠다는 거냐"고 대통령이 외쳐대면 모두 숨죽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수행 중인 대통령(War President)은 보호돼야 하고, 싸움터에 나간 자기 나라 군인들은 어떤 경우든 비난하지 않는다는 게 미국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둘씩 드러나는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는 믿기 어려울 만큼 외설적이고,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다. 일부에선 미군 정보기관이 그런 행위를 방조하고, 교사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렇다면 600여명의 전쟁포로가 외부와 완전 차단된 채 갇혀 있는 쿠바의 관타나모 미군 수용소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 중인 군대와 대통령을 감싸겠다는 미국의 전통을 비난할 순 없다. 하지만 그게 대통령의 억지 주장, 군인들의 마구잡이 행동까지 무조건 덮어주는 것으로 변질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미국은 해마다 세계의 인권백서를 발표하면서 지구촌의 인권경찰 노릇을 한다. 그러나 경찰이 부패하면 그건 공권력의 탈을 쓴 폭력일 뿐이다. 미국이 남들한테 들이대는 기준만큼 자신한테도 엄격한지 아닌지, 아랍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지켜보고 있다.

김종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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