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어머니의 구식냉장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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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결혼 7년만에 아파트에 입주하고 보니 좁은 셋집에서는 커보이던 냉장고가 너무 초라해 보였다.
「이사하면서 다들 새로 바꾼다는데…」.망설임 끝에 10개월 할부로 대형 냉장고로 교체했다.이젠 누가 집구경을 와도 당당할것같았다.
문득 냉장고를 정리하다가 요즘 큰 냉장고도 좁다고 바꾸느라 난리들인데 인천에 계신 친정어머니는 오래된 작은 냉장고와 더운여름내내 씨름했을 것만 같았다.어머니에게 전화해 『엄마,냉장고하나 큰걸로 들여놓죠』했더니 화들짝 놀라시며 『고장도 나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냐.나 죽을 때까지 쓸테니 그런 소리 말아라』하신다. 「분명 여유가 없어 그러실거야」하는 생각에 언니.동생들과 연락해 네딸이 돈을 거둬 어머니 동네의 가전제품 대리점에송금하고 『아저씨,냉장고 잘 배달해주시고 헌 냉장고는 수거해 가세요』했다.
냉장고가 배달되기로 한 날 엄마가 좋아하실 모습에 내가 더 흥분돼 전화를 드렸다.그런데 아버님께서 『너희 엄마가 냉장고 수거해 갈 때 얼마나 통곡했는지 모른다』하신다.무슨 말씀일까.
딸들의 효심에 너무 감동하셨나.아니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그 작은 냉장고에 대단한 애착심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그 냉장고는 우리 6남매를 키우느라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어머니가 공사판에 나가 여름내내 노동해 장만하신 것이었다.어머니는 냉장고 장만후 앓아누우셨다고 한다 .날마다 냉장고를 윤나게닦으시며 당신 땀의 결정체를 대견해하고 계셨을 어머니 마음도 모른채 효도한답시고 큰 불효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다음날도 어머니 목소리는 잠겨있었지만 『너희 덕분에 호강한다.고맙다』하시며 밝은 기분이시다.결국 오빠가 냉장고를 찾아와 다시 쓰기로 했다고 한다.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아가,고장나지 않게 잘 써라』하셨다고 해서 우리 식구는 모두 웃었다.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보니 입구부터 빈 공간엔 온통 가전제품이며 소파.침대등 쓸만한 물건이 산더미처럼 버려져 있었다.나 자신부터 반성해야 할 일이지만 물건의 소중함과 나름대로의 의미를새롭게 다져야함을 어머니의 눈물속에서 비로소 깨 달은 기분이다.
박경미 경기남양주와부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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