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지리기행>30.괴산군 연풍 기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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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난해 12월 『연풍지(延豊誌)』가 출간되었다.면 단위지역으로서는 희귀한 예다.역사가 오랜 고을인 까닭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나라에 이만한 역사를 지닌 고을이야 어찌 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아마도 주민들의 애향심이 이런 결실을 내게된 것이라 여겨진다.다만 군지든,면지든 그 편제가 거의 천편일률적이라 그 고장의 특징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단점은 『연풍지』 역시 어쩌지를 못하고 있다.
고종 때 연풍 인구가 5천명 가까이 되었는데 1993년 인구는 2천명도 안된다.행정구역의 들쭉날쭉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인구 감소 정도가 듣기에도 민망스럽다.가장 큰 연풍초등학교는 1926년에 졸업생이 30명을 넘어섰고 68년에 는 1백90명까지 배출한 적도 있지만 94년 졸업생은 남녀 합해 고작 39명이었다.원풍리에 있던 신풍분교는 이미 93년 폐교되고 말았고. 고을은 그처럼 기울어가지만 옛 역사의 광채에 그을음이 지는법은 없다.그나마 다행한 일인지는 내 알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참으로 그림같은 풍수 배치가 있어 먼저 그 얘기부터 해보기로 한다.다름 아닌 천주교 연풍성지(聖地)가 바로 그곳이다.
정조 15년(1791년) 전라도 진산 땅(지금의 충남금산군진산면)의 선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신주를 불사름으로써 벌어진 신해교란(辛亥敎亂)으로 그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신봉하였다는 죄목으로 순교자가 된다.이 교란 이 후 교인이던 추순옥(이는 연풍지의 기록이고 괴산군지에는 秋顧玉으로 기재되어있음).이윤일.김병숙.김말당.김마루등이 이곳에 숨어들어 살다 순조 원년(1801년)에 벌어진 신유교란으로 결국 연풍관아에서처형되고 만다.1974년에 이르러 바로 그 자리 4천여평을 구입,연풍현의 내아(內衙,즉 官舍)건물을 사서 옮기는 한편 이곳병방골 출신으로 고종3년(1866년) 충남보령군오천면 갈매못에서 순교한 한국 천주교 1백3성인(聖人)의 한 사람인 성 황석두(聖 黃錫斗) 루 가의 입상을 세워 성역화되었다.
바로 그 배치의 상징성이 기가 막힐 정도로 절묘하다는 뜻인데성 황루가의 묘소가 말하자면 성역 공간의 중심을 차지하고 그 뒤로는 연풍관아의 내아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옆에는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이 서있다.바로 그 모두를 감싸안을듯 자애롭게 그리스도상이 정면을 포용하고 있는 가운데 그 뒤로는 멀리 병풍처럼눈덮인 산들이 이들 모두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박해받던 순교 성인의 묘소와 박해하던 관아가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바로 이웃하여 자리를 잡고 있다는 상징성은 신앙인이 아닌나같은 사람에게도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으니 당자나 신자들은 어떠할 것인가.이 시설물의 배치와 조경을 담당한 사람이 그런 구도를 마음속에 그리며 이곳을 꾸민 것이라면 그의 신앙심과 천재성은 재언의 여지가 없을 듯하고,만일 우연이라면 그것은 그들이 믿는 신의 뜻이었을 것이다.
다만 주위 산세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건물과 입상들이 제각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흠인듯 보이지만 그것은 그쪽에 문외한인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는 일이라 탓할 바는 아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천주교 성지들을 보면 풍수상 화성(火星)의 산자락에 자리를 잡는 경우가 많다.이곳 역시 예외는 아니라 군지에 이르기를 『청파산(靑坡山.일명 渴馬山)의 화기(火氣)가 관아에 비치므로 동헌 서쪽 50 거리에 연지(蓮池 )를 파고 갈마산 중턱에 둑을 쌓아 그 화기를 막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연지는 연풍초등학교에서 양어장으로 이용하다 지금은 천주교 연풍공소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이 문제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그 하나는 화성의 산세란 것이 험함을 그 특징으로하는 것이라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들어간 곳에 그런 험세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점이고,또 하나는 갈마음수형국(渴馬飮水形局)이니만큼 목마른 말이 물을 먹기 위한 연못이 필요하여그런 시설을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풍수가 권한 화기를 막으라는 이 권고가 그저 쓸모없는 미신일 뿐일까.꼭 그렇지는 않다.거기에는 합리적인 땅의 이치에 대한 지혜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는대목들이 있다.연풍현은 지금 괴산에서 문경으로 넘 어가는 간선도로 변을 따라 흐르는 달천의 지류인 쌍천가에 자리하고 있다.
쌍천 지류는 심산에 나있는 협곡이다.
게다가 수안보로 넘어가는 작은새재쪽 원풍천은 그보다 더 심하고 좁은 협곡이다.바로 그 두 협곡이 마주치는 좁은 산간 분지에 터를 잡은 것이 연풍고을이다.그러니 폭우에 견디기가 쉽지 않다. 그런때를 대비하여 물을 가둬둘 장소가 필요하고,그것이 연지와 둑을 만들라는 풍수 설화로 변질된 것이라고 본다면 풍수가 한낱 미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천주교 성지 바로 근처에 연풍초등학교가 있고 그 안에는 옛날 연 풍동헌이던 영조 42년(1766년)에 지은 「풍낙헌(豊樂軒)」이란 건물이 있다.인공 구조물은 내 관심이 아니나 기왕 이곳에 왔다면 한번 볼만하다는 생각은 든다.더구나 초등학교란 곳은 우리들에게 알 수 없는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곳이 아니던가.
오후 다섯시,여름이지만 산골의 해는 벌써 많이 기울었다.오늘밤은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인 수안보온천에서 몸 호강을 좀 해보는 것도 정처없는 여행객에게는 위안이 되지 않으랴.하지만 그냥 여관 신세를 지기에는 성격이 맞지 않는다.가는 길에 원풍리신풍마을에 들렀다.『연풍지』에 이르기를 이곳에는 아주 좋은 샘(한샘)이 있는데 이 마을 명기(名氣)를 물맛이 다 앗아갔기 때문에 인재가 배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15년전 시집왔다는 김씨댁(43세.이름은 밝히지 않기로 함)얘기로는 휴게소가 생긴 이후 물맛을 많이 버렸다고 한다.
물 때문에 인재가 나지 않는다는 말은 처음 듣지만 고개 넘어오수마을은 인물도 많이 났고 교육열도 높은데 자기네는 좀 떨어진다는 말을 한다.아마도 아주머니의 순박성과 겸손함이 그런 얘기를 하게 된 것이겠지만 얼핏 너무 좋은 물맛이 마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나간다.문경새재를 넘는 길가 마을에 물맛이 좋다면 과객들의 출입이 잦았을 것이고 그들이 정착 농경마을에 들어와 공연한 바람을 잡지나 않았는지 모를 일이 아닌가.지금도 그 우물은 그 자리에 있다.
***신 풍주유소에서 4백쯤 올라가다보면 왼쪽으로 길가에 「산불조심」이란 표지판이 나온다.그런데 이 표지판이 잘 보이지를않아 탈인데 마침 길 건너편에 비닐하우스로 된 가겟집이 있고 거기 마침 주차장도 있어 찾기가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다 .
흔히 이체불(二體佛)로 알려진 보물 제97호 마애불좌상이 있는곳이다.임진왜란때 이여송이 장사의 모습을 한 이 불상 때문에 큰 장수가 출생할까봐 불상 뒤쪽의 혈맥을 자르고 부처의 코를 떼어버렸다는 얘기가 전한다.자세히 보니 정말 제대로 된 코가 아니다.이 땅 곳곳 일본과 중국에 의하여 풍수 침략을 당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는 모양이다.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성역화된천주교 성지와 코가 잘려져 나간 불상,묘한 대비다.
〈풍수지리연구가.전 서울대교수〉 최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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