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싱가포르式 설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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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싱가포르가 비틀거리게 된다면 우리는 말레이시아에 우리를 다시 맡아 달라고 부탁할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연세대에서 농성을 벌여온 한총련 학생들에 대한 경찰의 진압작전이 있었던 지난 20일,싱가포르 TV는 고촉통(吳作棟)총리의 이런 경고가 담긴 독립기념일 연설을 녹화방영하고 있었다.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연설이기는 했지만 고촉통총리 가 주로 겨냥한 것은 독립이후 출생한 젊은 세대였다.
싱가포르에서도 세대간의 가치관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은 사회적 문제이자 국가적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지난 65년 말레이시아연방에서 떨어져 나와 도시국가로 새 출발한 싱가포르는 마치 우리가 지난 60년대와 7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리콴유(李光耀)총리의 강력한 영도아래 중국인의 상재(商才)에 근면과 규율을더해 오늘날 1인당 국민소득이 1만5천달러를 웃도는 번영을 이룩해냈다.그러나 인구 2백90만명에,면적은 서울만한 싱가포르는나라 운명이 언제,어떻게 될지 늘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리콴유 전 총리의 표현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굶주린 바다가운데 떠있는 작은 새우」다.「말레이시아가 삼키려면 30분,인도네시아가삼키려해도 1시간이면 족하다」는 말이 농담이지만은 않은 상황이다.또 국가의 규 모가 너무나 작아서 국력을 집중하고 효율화하지 않으면 경제적 번영 역시 한계에 부닥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싱가포르의 지도자들은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 같은 근검절약과 위기의식 속에서 다시 한번 땀을 흘려주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젊은 세대는 젊은 세대 아닌가.고촉통총리의 지적에 따르면 인구의 47%나 차지하고 있 는 65년이후 출생 세대는 싱가포르가 어떻게 오늘을 이룩했고,그 한계는 무엇이며,생존을 위해서는 앞으로 어떻게 더 노력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채 그저 자신의 직업적 성공이나 집 장만,그리고 즐기는데만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이 다.
싱가포르 젊은 세대도 할 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삶을 즐기려는 욕구는 본능에 속하는 것이다.게다가 국력의 집중과 효율화를 위해 국민을 「철(鐵)의 규율」로 엄격히 통제해온 결과 젊은 세대들은 어쩔 수없이 개인주의적이 되고 통제에 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소비의 쾌락에 빠져들게 됐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싱가포르의 오늘이 「철의 규율」에 힘입은 바 큰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싱가포르 국민들로 하여금 압박감과 좌절감을 갖게 해 일부 기성세대마저도 싱가포르를 아예 등지게 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기도 하다.싱가포르는 평균 땅값이 서울의 2배가 되고 고급 아파트 가격은 서울의 4~5배는 된다.그런 비싼 땅.아파트를 팔아 해외로 나가면 경제적으로도,정치적으로도 더 여유롭게살 수 있다.또 기성세대에게는 어차피 싱가포르가 출생지가 아니다.「그런데 왜 내가 이 고생을 하 며 여기에 살아야 돼?」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싱가포르 정부가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국가의식이다.곳곳에 「나의싱가포르,나의 고국」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것도 그때문이다.
젊은세대들이 기성세대와는 달리 개인주의적이고 쾌락적이긴 하지만 싱가포르 국민으로서의 정체(正體)의식만은 기성세대를 능가한다고 한다.젊은 세대들은 바로 싱가포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에 다시 합병될지 모른다는 고촉통총리의 경고도 젊은이들의 그런 정체의식을 믿고,자존심을 자극해 이들을 위기감속에서 더 열심히 뛰게 하려는 정치적 책략이란 평도 있다.
숨은 의도가 무엇이었든간 2시간15분에 걸친 고촉통총리의 연설은 인상적이었다.보기에도 시원한 190㎝의 훤칠한 키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중간중간에 개인의 경험이나 에피소드까지 섞는 여유를 보이면서 청중의 웃음과 갈채를 자연스럽게 유 도하고 있었다.의미심장한 내용을 설득력있게 전달해나가는 모습은 딱딱하고 판에 박힌 표정과 목소리로 그저 남이 써준 원고나 읽는 정치지도자들을 대해온 우리로서는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부러웠던 것은 정부가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정확히 알고 있고,그를 실현할 수단을 명확히 설정하고 있었으며,최고지도자가 교육.주택.정보통신.의료등의 전문적인 국가적 과제내용까지도 속속들이 이해해 국민들에게 미래의 청사진을 자상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논설위원.싱가포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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