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5. 아버지 김도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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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은 이것 딱 한 장 남아 있다. 내가 세 살 때다.

 나는 1931년 3월 19일 대구 봉산동 27번지에서 아버지 김도학(당시 33세)씨와 어머니 이경이(30세)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북 영천 사람으로 대구 조선민보사 기자였고, 곧 이어 서무부장 겸 경리부장이 돼 신문사 살림살이를 도맡으셨다. 이때 대구 인구는 10만 명 정도였고, 신문사는 2층 목조건물로 대구시청 옆에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안동에 광산도 가지고 있었고, 의성·영천 등에 토지도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세 살 때 겨울, 대구우체국 옆에 있는 약방에서 점원들이 춥다고 알코올을 스토브에 넣었다가 불이 났다. 뒷집인 우리 집까지 불이 번져 안채가 전소됐다. 당시 나는 아이 보는 분에게 업혀 밖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집은 곧 복구됐지만 아버지·어머니 사진과 서류 등이 다 타버린 것이 아깝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공설운동장에서 무슨 경기가 있으면 꼭 나를 데리고 가셨다. 엄복동의 자전거 경주를 구경한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하늘에 안창남, 땅에 엄복동’이란 말이 유행할 때였다. 바이올린 연주와 요술대회를 구경한 생각도 난다. 경북도지사가 주최하는 파티에도 나를 데리고 가셨다. 금으로 수놓은 예복을 입은 도지사를 보고 ‘나도 도지사가 돼야지’ 했던 적도 있다.

다섯 살 때 베를린 올림픽이 열렸다. 아버지·어머니와 함께 대구 만경관(영화관)에 가서 ‘민족의 제전’이라는 올림픽 기록영화를 봤다.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아버지는 재주가 많은 분이었다. 바이올린과 오르간 연주도 잘 했고,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는지 ‘금강산 유람기’도 쓰셨다. 외금강과 내금강 구석구석을 걸어서 다닌 느낌을 담았는데 지금 봐도 유명 작가의 작품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일찍 퇴근할 때면 마루에서 모자를 받는 게 나의 일과였다. 가끔 형이 가로챌 때가 있었는데 내가 울면 아버지는 다시 모자를 쓰고 마루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곤 하셨다.

내가 여섯 살 때인 37년, 아버지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 2주일쯤 누워계셨다. 그 와중에도 연말 결산과 봉급 지급을 위해 사무실에 나가 하루 종일 근무하고 돌아오셨다. 한밤중에 인력거로 집에 돌아온 아버지의 몸은 불덩이 같았다. 급히 도립병원에 입원했지만 이미 급성폐렴으로 악화돼 다음날 오전 돌아가셨다. 기적의 묘약이라던 페니실린이 들어오기 6개월 전이었다. 형은 밖에 놀러 나갔다가 임종을 못했다. 돌아와서 몹시 우는 모습을 봤다. 그 형도 3년 전에 타계했다.

아버지와 찍은 사진은 딱 한 장 남아 있다. 세 살짜리 아들의 손을 잡고 똑바로 서 계신 사진 속 아버지. 비록 내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지만 단 하루도 아버지의 존재를 잊은 적이 없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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