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조>앞날 불안한 臥病 옐친의 러시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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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체첸 공화국의 수도 그로즈니에서 체첸 반군들이 공세를 재개한가운데 9일 거행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제2기 취임식은 『신(神)이여,우리 러시아는 너무 초라합니다』라는 문호 푸슈킨의 말을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흐루시초프가 공산당 대표들을 위해 건축한 의사당 건물,경색된의전행사,축제의 영웅이지만 병색이 완연한 옐친 대통령의 부자연스런 태도등은 과거의 소비에티즘을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대통령 근위대의 복고적 유니폼과 알렉스 2세 대주교의검은 복장은 구(舊)체제의 분위기를 더욱 물씬 풍겼다.
이는 종말을 고하는 브레즈네프주의를 부정하던 70년대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구회원들이 도와 만들어낸 모습은 결코 아니다.
비록 대통령제의 민주체제로 전환했지만 옐친 대통령은 병들고,러시아도 그와 함께 병들고 있다.
지난달 3일 실시된 2차 결선투표는 공산주의에 대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보복과 모험에 대해 안정 희구가 승리한 것으로 간주됐으나 이는 새로운 불안을 야기하고 있다.
이같은 온갖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가는 지금 취임 직후 2개월 동안 휴식을 떠난다는 공식적 발표만 내놓은 옐친 대통령은 현재로선 국정을 수행하기 힘든 상태로 보인다.
그는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를 다시 선택했다.체르노미르딘의 임명은 국민총생산(GNP)의 30%를 차지하는 에너지 산업을 보유한 「새로운 러시아」를 무시할 수 없는 서방을 안심시키고 있다.그러나 체르노미르딘의 국민적 인기는 극 도로 허약하다. 「민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나톨리 추바이스가 대통령 측근으로 복귀함으로써 자유경제정책이 계속 추진될 것이라는 사실도 보장됐다.그러나 자유경제정책에 대한 의지만으로 생산체계가 제대로 가동되고,대부분의 기업이 지불중단 상태에 있는 지금 시장 질서를 진정으로 진작하며,밀린 임금을 지급하고,세금을 거둬들이기에는 불충분하다.
또한 법치국가로서 이제 걸음마 단계에 있는 러시아를 지배하고있는 독선주의와 혼란의 혼합을 대체하기에도 미흡하다.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옐친 정권은 오래 전부터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왔다.특히 그를 괴롭히는 체첸 분쟁을 체면을 잃지않고해결할 수 있는 기회들을 놓쳐버려 매우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수모를 겪고 있다.
알렉산드르 레베드 안보위원회 서기를 체첸 사태에 대한 대통령대표로 지명한 것은 이 궁지에서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동시에 대통령에 대한 야망을 노골적으로 표명하는 레베드에게는 독이 든 선물일 수 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로부터 권력을 빼앗기 위해 민주진영들이 결합해 옐친 대통령을 밀면서 공산주의의 막을 내리게 했던 대(大)도약과 직감의 시대는 지났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옐친 대통령은 그의 후광을 노리며 밥그릇싸움을 벌이는 각 파벌 사이에서 곡예를 하고 있다.이는 정권의종말을 예고하는 하나의 특징이다.
[정리=고대훈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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