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청산해야할 日帝 군사문화 잔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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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각종 잔혹행위에 대해서는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인 자신들도 그 본질을 석연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같다.그러기에 원폭투하등 일부 사실만 들어 스스로 피해자를 자처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 아니겠는가.
포로와 민간인 학살,군위안부 동원,심지어 사람고기를 먹기까지한 일본군의 만행은 동양의 윤리기준으로도,서양의 기준으로도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그렇다고 그런 범죄에 참여한 일본군인 하나하나가 사악한 인간이었다고 치부해버릴 수도 없 다.그 대부분이 선량한 보통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전범재판을 통해 확인됐다.
결국 체제 문제에 큰 몫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당시 일본군은 다른나라 군대에 비해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지휘체계를 갖고있었다.상명하복의 원칙 앞에 하급자의 인격이나 인권은 철저히 유린됐다.필자가 복무한 70년대말까지 우리 군대 에도 이 전통이 남아있었음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일본군이 인격과 인권 뿐만 아니라 인명까지 경시하는 풍조는 천황숭배가 부추긴 것이다.천황에게 충성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면「고쿠타이(國體)」속에 영생을 얻는다는 이데올로기로 병사들에게최후까지 물러서지 않는 「고쿠사이(玉碎)」를 강요한 것이다.유명한 가미카제특공대가 그 단적인 예다.
자존심 없는 사람이 남을 존경할 줄도 모르듯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들은 남의 목숨도 아낄 수 없는 것이다.천황폐하를 위해 자기 몸과 마음과 목숨을 바치려는 자가 어찌 적국의 포로와 민간인,그리고 식민지 백성을 희생시키는데 망설임이 있을수 있었겠는가.
올림픽에서 욕심만큼 금메달을 거두지 못한 아쉬움의 표현이 도를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마라톤에서 2위로 들어온이봉주선수가 늠름하게 태극기를 휘날리며 트랙을 돌때 방송해설자가 『저만한 힘이 남았으면』막판 스퍼트에 더 힘 을 쏟을 수 있었지 않았겠느냐는듯 아쉬워하는 말에서 「고쿠사이」정신을 느끼고 섬뜩했던 것은 내가 너무 예민한 탓일까.
스포츠든 경제든 모든 경쟁에는 상대가 있는 것이다.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경쟁 현장에서 모자라는 실력으로라도 이기고 봐야 겠다는,상대를 무시하는 자세는 결국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파괴하는 결과로 돌 아올 수밖에없다. 16년전의 쿠데타 주동자들이 중형을 구형받았다.상황을 극한으로 몰고 가는 일본군의 옥쇄정신이 우리 군대에 이어져 역사의 굴곡으로 작용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남을 이기려 들기보다 스스로를 향상시키는,1등보다 1류를 지향하는 분위기가문민시대에는 자라나기 바란다.
김기협<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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