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시론

김정일 권력의 공백과 여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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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와병설을 두고 북한 당국은 여러 통로를 통해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이 40일째 모습을 보이지 않아 점차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김 위원장 한 사람에게 당·군·정 일체의 권력이 집중돼 있는 북한 권력구조의 특성을 고려할 때 그의 와병은 권력구조의 변화를 촉발할 만한 폭발력을 갖고 있다. 가장 큰 관심거리는 내부의 권력투쟁 발생 가능성일 테지만,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판단하려면 현재 상황을 두 가지로 나누어 가정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김 위원장의 상태가 정상적인 통치가 불가능할 정도로 안 좋아서 권력이 ‘공백’에 빠진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 운용에 일정한 ‘여백’이 생겨났지만 상당 부분 김 위원장이 계속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다.

김 위원장의 정치적 부재로 누군가 혹은 어떤 대안 세력이 이를 메워야 하는 공백 상태라면 권력 엘리트 간의 갈등이나 투쟁의 개연성은 충분하다. 반면 단순한 여백 수준이라면 전적인 통치권 이양 대신 필요한 만큼의 통치권 위임을 통해 이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권력투쟁 가능성은 크지 않다.

“부축하면 일어설 수 있는 상태” “양치질이 가능한 상태” 등 국가정보원의 국회정보위 보고 내용과 “언어 구사와 사고 활동상의 지장이 없다”는 중국 당국의 설명을 종합하면 현 상태는 공백보다는 여백에 가까워 보인다.

또 하나의 눈여겨볼 포인트는 북한 권력 엘리트들의 태도다. 이들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 집단심리에 따라 자신들의 행보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공멸 방지 심리다. 엘리트들이 권력의 공백이나 여백을 선점하려 각축을 벌일 경우 모두 함께 망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견제와 균형의 메커니즘이 자연스럽게 작동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9월 8일 정권 창건 60돌 기념 중앙보고대회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이례적으로 ‘김정일 영도자에게 드리는 5대 권력기관의 축하문’을 낭독한 것은 김 위원장에 대한 충성 결의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기득권 유지 심리다. 김일성 주석과 김 위원장은 체제와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장군님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는 식의 운명공동체 의식을 강조해 왔다. 최고 지도자와 핵심 권력 엘리트의 운명이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온 것이다. 실제 북한의 엘리트들은 충성과 복종의 대가로 특권과 특혜를 누려왔다. 이들은 김 위원장이 없는 권력의 공백 상태를 위험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고, 현 체제 고수가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북한 권력 엘리트들의 이러한 심리는 후계구도에 반영될 것이다. 이들은 세습만이 권력의 여백이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60년간 만들어 온 ‘백두혁명의 역사적 뿌리’와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의 정당성’을 이어가는 것이 권력투쟁을 막고 정치적 충격과 인민들의 동요를 최소화할 사실상 유일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세습 후보군의 어린 나이와 취약한 리더십이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 북한 권력 엘리트들이 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집단지도 체제 권력구조를 보태는 것이다. 정치(당)와 행정(국가)의 분립을 통해 단결의 중심인 당은 김정일 후계자가 맡고, 행정의 중심인 국가는 김정일 위원장 측근들이 포진하는 형태를 구상해 볼 수 있다.

북한은 ‘주체의 태양(김일성)’과 ‘선군의 태양(김정일)’을 거쳐 떠오르는 태양을 의미하는 ‘백두산 해돋이’를 후계자로 만드는 일에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이 작업은 수령 중심의 절대주의 체제에서 수령과 핵심 권력 엘리트의 상대주의 체제로의 변화를 구축하는 새로운 실험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김정일 이후의 북한 체제 향방에 대해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지키면서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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