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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기쁨 <80>5대 샤토를 마시는 기쁨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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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30면

샤토 라투르 2005년산.

보르도의 2005년산 와인은 뛰어난 품질 때문에 가격이 심하게 뛰었다. 5대 샤토로 말할 것 같으면 93~95점으로 파커 포인트가 가장 낮은 샤토 무통(Ch. Mouton)이 10만 엔에 약간 못 미치는 가격으로 제일 싸다. 나머지는 전부 10만 엔이 넘는다. 98~100점을 받은 샤토 마고(Ch. Margau)는 14만 엔 전후의 고가에 팔리고 있다. 다섯 병을 다 살 경우 60만 엔을 지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나는 결국 2005년산 5대 샤토를 한 병도 구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심 위대한 2005년산 5대 샤토의 맛이 궁금하던 차에 일본의 와인 전문지 ‘와인아트’로부터 ‘5대 샤토 시음회에 참석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연락을 받았다. 마침 날아든 이 반가운 초대에 우리 남매는 서둘러 와인아트 편집부로 달려갔다.
위대한 해의 일류 보르도 와인은 젊을 때는 쓰고 떫고 짭짜름해(미네랄 맛이 소금처럼 느껴진다) 마시기가 몹시 불편하다.

시음용 글라스에 가장 먼저 따른 진한 자줏빛 샤토 오브리옹(Ch. Haut-Brion)을 바라보며 나는 ‘2005년산 5대 샤토도 그냥 마시기는 힘들군’ 하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오브리옹 2005년산은 떫고 짜고 바위처럼 단단했다. 고전적인 장기 숙성형 와인이라 시간이 지나면 훌륭한 와인으로 바뀔 것이 분명하지만 현 단계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이것을 와인 초보자가 디캔팅도 하지 않고 마신다면 “맛없어!”라며 얼굴을 찌푸릴 게 분명하다.

다음으로 마신 샤토 마고는 혀가 얼얼할 정도로 강한 타닌이 느껴졌지만 여왕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우아함이 살아 있어서 당장 마셔도 맛있었다. 하지만 잇따라 두 번 디캔팅을 했더니 맛의 밸런스가 미묘하게 깨졌다. 파커 포인트 98~100점을 받은 마고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리 없는데 의아했다. 와인은 보존 상태에 따라 맛에 차이가 생기곤 하는데 우연히도 이 마고가 그런 경우인지 모르겠다.

세 번째로 마신 샤토 무통은 역시 무통답게 풍부하고 외향적인 맛이 났다. 샤토 라투르(Ch. Latour)는 문을 꼭꼭 닫아걸고 있었지만 테루아르를 그대로 반영한 듯 단정하고 근사해 이것 역시 라투르답다고 생각했다.

놀라웠던 것은 샤토 라피트(Ch. Lafite)다. 5대 샤토의 필두인 이 와인은 정말 굉장했다. 글라스에 얼굴을 갖다 대자 풀의 훈김 같은 카베르네 향기가 밀려들었다. 진하고 단단해 현 단계에서는 마시기 불편하지만 당당하고 멋진 골격과 귀부인 같은 우아함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무엇보다 여운이 길다.

향수 같은 카베르네 향기가 1분 가까이 입 안에 남아 있었다. 이 긴 여운이 바로 세계 최고의 와인이라는 증표이리라.
위대한 5대 샤토를 한자리에서 나란히 마셔 보니 각각의 뛰어난 개성이 한층 부각돼 ‘1등급이라는 등급은 괜히 붙은 게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가격만 조금 싸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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