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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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파티 때 입으라며 남편은 한복감을 사가지고 왔었다.진홍빛 장미꽃 무늬가 놓인 벨벳 시퐁.소위 「오팔」이라 불리는 고급 천이었다. 「오팔」 치마저고리는 그 무렵의 최첨단 유행 옷이었다. 그러나 그 치마저고리를 화려하게 휘감고 댄스 파티의 여주인노릇을 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한복 맵시로 기생들과 겨루기는 어렵다. 미군부대 타이피스트였을 때 직속상관이었던 여장교가 결혼선물이라며 준 블라우스를 꺼냈다.
아이보리색의 얇고 부드러운 조젯 실크 블라우스였다.고운 수(繡) 깃이 고전적인 멋을 한껏 돋우고 있었다.같은 조젯 실크의감색(紺色) 한복 치마를 뜯어 주름 스커트를 만들어 이 블라우스에 받쳐 입었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무지개빛 천연 진주의 뒤꽂이를 올림머리에꽂고 18금의 가느다란 실반지를 끼었다.대학 때 친구들끼리 만들어 낀 우정의 반지였다.
이것이 치장의 전부였다.
그러나 을희는 파티의 여주인공답게 아름답고 우아했다.그녀의 품위를 따라잡을 기생은 아무도 없었고,그녀의 세련된 매너와 영어 말씨는 흉내조차 내지 못했다.
파티는 대성공이었다.적어도 남편의 「장삿속」으로는 그랬다.
남편은 을희가 머리에 꽂은 진주 뒤꽂이 자랑을 고위장교한테 늘어지게 했다.정승을 지낸 6대조 할아버지가 정경부인(貞敬夫人)인 자기 아내에게 선물한 것을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라 부풀려말했고,그 고위장교는 을희의 뛰어난 기품이 「가 문」에서 오는모양이라며 연방 감탄했다.그는 군수관계 책임장교였다.남편은 앞으로 특별한 대우를 그 장교로부터 받을 것이 분명했다.
모두 썰물처럼 물러간 홀에서 신바람나는 듯 남편은 을희를 껴안고 춤을 췄다.몸을 좌우로 흔드는 천한 춤새의 트로트였다.
을희는 전혀 춤을 출줄 모른다.몸을 뒤흔들며 추는 남편의 발을 몇번씩이나 밟았다.
『에이! 대학보다 춤학교를 먼저 다녀야겠구먼….』 남편은 김이 샌듯 투정했다.
『아까 그 문관(文官)하곤 잘 추더만….』 을희는 그 「문관」이라는 미국인을 되생각했다.
그는 묵묵히 칵테일만 마시고 있었다.
『춤 안추세요?』 안주를 갖다 주고 물었다.
『같이 춰주시겠습니까?』 느닷없는 청에 당황하며 을희는 고개저어 웃었다.
『저는 춤도 못추는 못난이인 걸요.』 『별거 아닙니다.걷기만하면 돼요.저스트 워킹….』 그는 삽시간에 을희의 손을 잡고 홀 가운데로 들어섰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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