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오락프로 안전 불감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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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문화부 기자

SBS '웃찾사'에 출연 중인 개그맨 김기욱씨가 오락 프로그램 녹화 도중 다쳐 한동안 방송활동을 못 하게 됐다. 김씨는 25일 SBS '일요일이 좋다'의 'X맨' 코너 녹화 도중 '말타기' 게임을 하다 넘어져 왼쪽 무릎 인대가 파열됐다. 완치까지는 1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김씨는 '웃찾사'의 '화상고'코너로 인기 절정에 오른 신인이다. 오랜 무명생활을 끝내고 막 날개를 펴려는 마당에 안타까운 사고를 당했다.

김씨가 사고를 당한 '말타기' 게임은 이미 여러 차례 위험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성우 장정진씨가 KBS2 '일요일은 101%' 녹화 도중 떡 먹기 내기를 하다 기도가 막혀 숨진 지난해 10월 '말타기' 게임은 '실제상황 토요일'에서 방송되고 있었다. 본지도 이 게임의 위험성을 지적했고, 시청자 게시판에도 "정말 위험한 놀이" "허리 다칠까 걱정" 등의 우려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SBS는 이런 경고를 무시하고 가을 개편 때 이 코너를 '일요일이 좋다'로 수평이동하는 애착을 보였다.

일명 '말뚝박기'로 불리는 '말타기' 게임은 네다섯 명이 줄지어 허리를 굽히고 앞사람 다리 사이에 머리를 넣고 있으면 다른 팀원들이 그 위에 뛰어 올라타는 게임이다. SBS는 덩치 큰 출연자가 올라탈 때 '말'역할을 하는 출연자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비몽사몽' '비틀' 등의 자막을 곁들여 '재미있게' 편집, 방송해 왔다.

TV 오락 프로그램의 가학성은 하루이틀 된 문제가 아니다. 출연자를 괴롭혀 시청자를 웃기겠다는 저질 발상이 낳은 안전사고도 상당수다. 지난해 성우 장씨의 사고 직후 방송위원회는 방송심의규정에 '지나치게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인 내용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추가했고, 방송사들도 대응책 마련에 부산했다. 하지만 '설마…'하는 안전불감증은 바뀌지 않았다. SBS는 25일 결국 자사의 대표급 개그맨을 쓰러뜨리고서야 '말타기' 게임을 폐지하기로 했다.

사고 재발을 막겠다는 다짐은 언제까지 공염불에 그칠 것인가. 이제라도 '출연자 고통→시청자 웃음→시청률 상승→광고 증가'란 유치한 고리를 끊어야 한다. 가학적인 프로그램이 재미를 준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지영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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