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에너지 가격정책 근본적으로 바꿔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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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국전력과 가스공사의 적자를 국고로 메워주기 위한 추가경정예산안이 국회의 파행 속에 무산됐다. 추경안의 무산은 표면적으로 국회 운영을 둘러싼 여당의 무능과 야당의 억지로 빚어졌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에너지 가격정책과 물가정책 사이의 상충관계에서 비롯됐다. 정부는 물가를 잡는다며 상반기에 인상 요인이 컸던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을 억지로 묶었고, 그 바람에 한전과 가스공사는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정부는 한전과 가스공사가 상반기에 본 적자 가운데 연료비의 50%에 해당하는 1조원을 추경예산을 통해 보전해 주기로 약속했다. 전기요금과 가스요금 인상분을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주기로 한 것이다. 요금 인상 대신 세금을 사용해 물가를 잡는 정책을 택한 것이다.

이에 대해 야당인 민주당은 한전과 가스공사의 적자 보전을 위한 추경 편성에 반대했고, 결국 추경안은 무산됐다. 정부가 적자를 메워줄 수 없다면 이제 남은 일은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을 대폭 올리도록 허용하는 것뿐이다. 당연히 추석 이후 물가에 비상이 걸릴 것이 뻔하다.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은 그 자체로도 소비자물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거니와 전기와 가스를 사용하는 연관산업의 원가 상승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물가 억제를 위해 묶었던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이 하반기 최대의 물가 상승 요인이 돼 버린 것이다.

우리는 추경 편성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차제에 에너지가격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본다. 에너지가 공짜가 아니고 이를 공급하는 공기업이 자선단체가 아닌 이상 에너지 값은 원가를 반영해 적정하게 책정돼야 한다. 물가 억제를 명분으로 값을 묶는 것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소비자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내 오히려 자발적인 에너지 절약을 막고 자원 배분을 왜곡할 뿐이다. 더욱이 에너지 값 인상분을 세금으로 보전하는 편법은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소비자의 부담을 에너지를 적게 사용하는 국민들에게 전가하는 불공평한 처사다. 에너지 가격을 물가정책에서 떼어내 시장원리에 맡기는 것이 최선의 에너지 절약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