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화유산 답사'이뤄지기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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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가 1997년 9월부터 네차례에 걸쳐 실시한 방북 취재활동은 통일에 앞선 남북간 비정치적 문화교류에 언론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북한지역의 문화유산 답사와 노동신문과의 제휴협력사업 협의 등은 분단 이후 남과 북 사이에 처음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

중앙일보 방북 취재활동이 갖는 의미와 그동안 지면에 알릴 수 없었던 방북 뒷이야기들을 창간 33주년 특집으로 모아 정리한다.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가 대북 (對北) 사업에 착수한 것은 지난 94년말부터였다.
그해 7월 김일성 (金日成) 주석의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이 물 건너가고 조문파동과 핵문제 등으로 남북간 거리가 멀기만 하던 무렵이었다.
사업의 목표는 방북취재 성사였다.

당국간 관계가 풀리지 않은 조건에서 방북취재를 추진하기는 몹시 어려웠다.
더욱이 당시 중앙일보는 이찬삼 시카고지사 편집국장의 밀입북 취재사건 때문에 북한측으로부터 심한 반감을 사고 있는 상황이었다.

95년 한햇동안 중앙일보는 중국 베이징 (北京) 의 조선족동포를 통해 지속적으로 대북창구를 두드렸다.
한동안 응답이 없었다. 대북사업에 성공하려면 소위 '줄' 을 잘 잡아야 했다.

당시 베이징에선 그 '줄' 로 고려민족산업발전협회 (고민발).노동당 39호실.대성총국.조국평화통일위원회 (조평통) 등이 자주 거론되고 있었다.
심지어 국가안전보위부 줄까지 소문으로 나도는 판이었다.

이렇듯 첩보와 소문은 많았으나 정작 북측 관계자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베이징에서 북한측 기업관계자와 접촉을 계속하는 한편, 96년 5월 이후엔 일본 도쿄 (東京) 로도 눈을 돌렸다.

도쿄에서의 파트너는 그곳을 자주 방문하던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회장 (재미동포) 이었다.
朴회장은 전에 국내 대기업총수의 방북을 주선한 바 있는 이 분야의 베테랑. 그러나 당시는 북측으로부터 소외됐다는 소문이어서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평양~도쿄~베이징을 오가며 활동하던 朴회장과 접촉하면서 그녀가 중앙일보의 대북사업에 매우 적극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꿩 잡는 게 매' 라는 심정으로 朴회장 및 북측 기업관계자를 사이에 넣고 96년 한햇동안 전력을 다해 중앙일보쪽의 생각을 북측에 전했다.

중앙일보가 전면에 내건 방북사업의 명목은 '북한문화유산답사' .중앙일보에 대한 북한측의 반감을 감안할 때 일반취재 활동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사업명목을 잘 잡아 북측 실무자들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북측은 97년 4월 드디어 중앙일보의 '문화유산답사' 를 수용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시행착오가 많았기 때문에 처음엔 선뜻 믿기가 어려웠다.
북측과 직접 접촉을 시작할 것인가를 놓고도 갑론을박이 있었다.

朴회장의 주선으로 우리는 97년 6월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책임자급 인사와 첫 접촉을 가졌다.
2년을 끌었던 문화유산 답사는 이후 급속히 진행됐다.

결국 97년 9월부터 98년 7월까지 통일문화연구소가 구성한 방북조사단이 세차례에 걸쳐 북한문화유산 답사활동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북측은 통일문화연구소 방북조사단의 활동과 연재 등 지면반영을 지켜본 끝에 올 8월 다시 중앙일보 홍석현 (洪錫炫) 사장의 방북도 받아들였다.
역사적인 언론사 대표의 첫 방북길은 이렇게 열렸다.

유영구 기자

▶ 게 재 일 : 1998년 09월 21일 08面(10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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