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특별한 국민, 특별한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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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통령 못해 먹겠다’던 지난 대통령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이토록 대통령직을 극도로 일하기 어려운 자리로 만들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제도적 또는 구조적인 원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우리 국민들이 갖고 있는 대통령에 대한 기대치가 다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높다는 사실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 정치문화에서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아 대대로 국민의 추앙을 받기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차적으로 제도적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국가운영의 모든 궁극적 책임을 대통령 한 사람에게 부과하면서 그가 책임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대통령 무책임제’를 한사코 고집하고 있다. 아마도 국민들은 세종대왕 같은 성군이 나타나서 대통령에 당선되는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종과 같은 인물이 과연 오늘의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별문제로 치더라도 재위 32년이란 오랜 세월을 두고 치적을 쌓았던 그분이 5년 단임제란 한계 속에서 얼마나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공적을 남길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렇듯 성공한 대통령이 나오기 어렵게 하는 제도적 한계도 문제지만 그보다 훨씬 심각한 것은 국민이 갖고 있는 대통령에 대한 과잉기대와 과도한 요구다. 도를 넘은 과잉기대의 결과는 결국 실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내포하게 된다. 지금껏 우리 국민들은 국가지도자에 대해 단일 기준이 아닌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평가해 왔었다. 첫째가 세계적으로 모든 국가지도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하는 일반적 기준이라면, 둘째는 한국의 대통령이기에 특별하게 적용되는 특수기준이라 하겠다. 문제는 우리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특수기준이 외국 지도자들에게 적용하는 일반기준보다 훨씬 수준이 높을뿐더러 그 기준을 충족시키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데에서 우리가 뽑은 대통령에 대한 예외 없는 실망이 비롯되는 것이다.

예컨대 민주화와 산업화란 두 목표 중 어느 하나라도 성공시킨 외국 지도자의 경우에는 우리 국민으로부터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필리핀의 아키노 대통령이 민주화에 헌신한 지도력은 높이 평가하면서 그가 경제발전에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이 한국인의 입장이다. 싱가포르를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화된 경제와 질서정연한 사회로 만든 리콴유 총리 역시 대단히 높게 평가하지만 민주화 차원에서 나타나는 한계는 외면하는 것도 우리의 이중적 자세다. 이렇듯 외국 지도자에게 관대한 우리 국민은 한국 대통령의 경우만은 민주화와 산업화 가운데서 어느 한쪽도 희생해서는 안 되고 둘 다 동시에 달성해야만 된다는 높은 기준을 강력히 요구해온 것이다. 그 기준을 만족스럽게 충족시킬 수 있는 대통령이 나타나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정치환경이 아닐 수 없었다.

분배와 성장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둘러싼 선택을 놓고, 또 그 선택에 따른 결과를 가지고 국가지도자를 평가하는 경우에도 위에서 지적한 일반기준과 특수기준의 이중성 문제는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우리 국민의 요구와 기대는 경제성장과 공정한 분배를 동시에 성취하는 것이다. 아무리 세계적인 환경이 어렵다 해도 한국의 대통령은 이를 성공시켜야만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찬사를 받을 수 있다.

대한민국 60년은 남다른 우여곡절 끝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룩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른바 선진화의 문턱에서 극심한 진통과 불안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가운데 국가운영의 제도적 한계를 극복하고 보완하기 위한 헌법 논의가 국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국민들이 지닌 대통령에 대한 과잉기대치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는 집단적 지혜다. 즉 나라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쉽게 융합될 수 없는 광범위한 여러 목표를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대통령의 노력을 좀 더 너그럽게 평가하는 국민적 여유, 조급함이 아닌 기다림으로 결과를 수용하려는 성숙된 우리의 자세가 기다려진다. 더불어 대통령과 정치지도자들도 대한민국 국민들의 이상과 기대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재인식하고 그에 부합하기 위한 각오를 새롭게 다져주길 기대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특별한 국민을 위한 특별한 자리임을 알아야 한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