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맛,춤이 넘치는 세비야의 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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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플라멩코 공연 관람이 아니다. 작열하던 태양 빛이 누그러드는 오후 8시면 스페인은 뜨거운 한낮의 얼굴과는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아랍과 유럽 문화가 뒤섞인 문화의 도시 세비야에서 식도락과 음악에 취해 만끽하는 늦은 여름밤의 정취, 그 아름다운 풍경을 소개한다.

오후 3시나 4시 즈음 세비야의 골목을 걷다 보면 지도를 손에 든 채 헤매고 있는 여행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흔한 관광 코스를 벗어난 그들은 굳게 닫힌 덧문과 텅 빈 거리의 침묵에 당황했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때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곤 한다. 그들에게 세비야는 어쩌면 완고하고 배타적인 도시로만 기억에 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40도가 넘도록 거침없이 쏟아지던 햇살이 누그러지는 오후 8시 즈음이 되면 세비야는 시에스타의 시간을 끝내고 고집스럽게 닫아 두었던 덧문을 열면서 기나긴 밤을 즐길 준비를 한다. 관광객이 주로 찾는 대성당 카테드랄과 알카사르 왕궁 주변이 조용해지기 시작할 무렵, 아직 기온은 30도가 넘는데도 마술처럼 시원해진 밤바람을 맞으며 세비야는 두 번째 하루를 시작한다.

세비야 사람은 “오후는 쉬는 시간, 여름의 세비야는 역시 밤”이라고 말하곤 한다. 아침과 낮에는 관광객으로 붐벼 잠시 앉아 있을 만한 벤치를 찾기도 어려운 알카사르 왕궁 또한 밤이 되면 조용하고 은밀하게 한여름 밤의 음악회를 시작한다. 10세기부터 파괴와 증축을 되풀이해 온 알카사르 왕궁은 아랍과 유럽 문화가 뒤섞여 ‘달팽이의 궁전’ ‘시의 정원’ 등의 이름을 가진 정원과 건물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 장소다.

여름이면 이 아름다운 궁전에서 밤마다 ‘알카사르 왕궁 정원에서의 밤’이라는 제목의 콘서트가 열린다. 7월에서 9월까지 날마다 계속되는 이 음악회는 클래식·플라멩코 등을 무대에 올리기 때문에 인적 드문 밤이면 더욱 짙어지는 나뭇잎과 꽃잎의 향기 속에서 평소 좋아하는 음악에 잠겨 볼 수 있다.

세월에 빛이 바래고 여기저기 돌 조각이 떨어져 나간 알카사르의 돌 벽을 배경으로 잠깐의 꿈같은 시간을 선물하는 음악회는 오후 10시에 시작하지만 9시부터 정원에 들어갈 수 있고, 입장권은 오후 7시부터 알카사르 왕궁 출구 자동판매기에서 신용카드로 살 수 있다. 공연을 소개하는 책자도 그곳에 비치돼 있다.

다소 폐쇄적인 세비야는 이방인을 ‘기리(Guiri)’라고 부르며 경원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이곳 사람이 말하는 ‘기리로 보이지 않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오후 6~7시에 저녁을 먹으러 가지 말 것”이다. 대부분의 바와 레스토랑은 7시가 넘어야 탁자와 의자를 바깥에 내놓고 영업 준비를 시작하기 때문에 8시30분은 되어야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세비야의 가장 중요한 쇼핑가인 시에프레스 거리와 카테드랄 주변에도 레스토랑이 많지만 이방인의 입맛을 고려하지 않은 ‘진짜’ 안달루시아 음식을 먹어 보고 싶다면 ‘알라메다 데 에르쿨레스(Alameda de Hercules)’를 찾아가면 좋을 것이다. 널찍한 가로수길 양편으로 카페와 바·레스토랑이 줄지어 있는 알라메다는 밤늦도록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활기찬 거리다.

여기서 가장 사람이 많은 식당을 찾아 들어가면 확실하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군데군데 게이 바가 숨어 있고 새벽이 되면 트랜스젠더들이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며 클럽 명함을 나눠주기도 한다.

음식과 야경을 동시에 즐기고 싶다면 과달키비르 강을 건너 트리아나(Triana) 지구를 찾아가야 한다. 카테드랄과 마리아 루이사 공원을 비롯한 중요한 관광지, 백화점 엘 코르테 잉글레스를 중심으로 한 쇼핑가가 강 건너에 몰려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관광객은 트리아나를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이사벨 1세 다리에서 쿠바 광장까지 이어지는 트리아나의 강변에서 바라보는, 오렌지색 조명을 받아 동화 속의 성처럼 빛나는 카테드랄과 황금의 탑은 다리를 건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만드는 매혹적인 풍경을 펼쳐 놓는다.

강 건너편보다 규모가 작은 대신 스페인다운 정취로 가득한 바와 레스토랑도 많다. 쿠바 광장 조금 못 미친 강변에 있는 ‘키오스코 데 로스 플로레스(Kiosko de los Flores, Calle Betis, Tel. 34-954-274-576)’는 옛날 흑백사진을 넣은 아기자기한 액자가 가득한 외벽으로 시선을 끄는데 전통 있는 생선튀김으로도 유명한 식당이다.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나면 새벽 1시가 가까워질 무렵이다.

이 시간이면 대부분의 바가 문을 닫거나 바깥 탁자를 치우고 실내에서만 영업을 하지만 당황할 필요는 없다. ‘디스코테카’는 지금부터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토르네오 가(Calle Torneo)의 ‘954’와 트리아나 지구에 있는 ‘보스’ 등이 인기가 있다(대부분 만 20세 미만은 출입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세비야의 밤은 플라멩코 관람이 전부가 아니다. 문을 꼭꼭 닫는 편이 오히려 시원할 정도로 뜨거운 햇볕에 녹아내려 일찍 잠이 들어 버린다면, 그래서 와인과 맥주와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한없이 쾌활해지고 다정해지는 세비야 사람들과의 밤을 놓친다면 안달루시아의 진짜 얼굴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축제의 밤이면 날이 새도록 거리에 선 채로 술잔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세비야노들은 평소에도 오후 10시에서 자정 사이에 영업을 시작해 아침까지 문을 여는 디스코테카를 누비며 태양을 맞는다. 싸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 생기가 도는 아침을 그들과 함께 맞는다면 비로소 알 수 있지 않을까. 왜 ‘여름의 세비야는 역시 밤’인지를.

글과 사진 세비야 = 김현정 프리랜서 [parody76@hanmail.net]

<중앙선데이 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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