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문화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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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78년 1월의 어느날 밤 베를린교향악단이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연주했을 때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이 연주를 감상한 유럽사람은 1억2천만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이 연주를 계기로 독일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이 많이 순화됐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악성(樂聖)베토벤의 이미지로 인해 「나치」의이미지를 얼마쯤 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 각국의 국제적 위상과 인식도를 높이는데 기여한 인물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항상 상위를 차지하는 것은 문화예술인들이다.
영국의 경우 『인도(印度)와도 바꿀 수 없다』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1위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네덜란드나 스웨덴조차 화가 반 고흐와 영화감독 잉그마르 베리만이 압도적으로 꼽힌다.
이들이 자국의 문화적 영향력 확대에 기여한 공로는 대사관 몇개를 합쳐도 이룩해낼 수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문화예술의 힘이다.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가.객관적으로 비교해도 우리 문화예술의 수준은 서구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는게 통설이지만 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저네들로서는 호기심의 차원을 크게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인」의 간판을 내건 개인적인 문화예술활동을 제외한다면 국가 내지 정부차원의 문화외교는 극히 보잘 것 없다는 점이 문제다.
서너해 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나라」특집을 게재한 일이 있었다.22개국을 대상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4개 분야의 통계에 의거해 채점한 결과 한국은고작 18위에 머물렀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종합 순위가 아니라경제분야에서는 상위권인 5위를 차지하고도 문화분야에서는 최하위권인 20위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그런 조사결과도 한국의 문화적 수준이 실제로 낮기 때문이 아니라 무지(無知)의 탓일 가능성도 있다.89년 정명훈(鄭明勳)씨의 바스티유 오페라 초대 음악감독겸 상임지휘자 취임이 한국 현대음악을 새롭게 인식케 하는 계기가 됐던 것처럼우리 문화예술의 실상을 세계각국에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
마침 정부는 鄭씨를 문화대사로 임명하리라는 소식이다.효율적인 문화외교가 되기 위해서는 활동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돼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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