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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7시간씩 크로키 연습 ‘나만의 그림체’ 찾았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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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 20면

최정동기자

가산디지털단지 내의 온라인 게임 개발업체 ‘M게임’ 사무실. 30여 명이 일하는 100평 규모의 사무실은 개인별 칸막이로 모자이크처럼 나뉘어 있다.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 낮게 깔리고 있다. 발걸음 옮기는 것도 조심스럽다.게임 캐릭터 디자이너인 김주현(25·사진)씨의 자리는 문을 들어서 왼쪽 코너에 있다. 3면이 가로막힌 개인 작업실에서 김씨의 펜이 태블릿 보드 위를 쉴 새 없이 미끄러진다.

③독창성 -게임 캐릭터 디자이너 김주현씨

태블릿 보드의 가로 48cm, 세로 30cm 평면은 그의 상상력이 펼쳐지는 곳이다. 펜촉이 지나간 자리에는 몬스터 캐릭터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기획 회의에서 정한 캐릭터의 성격과 특징에 따라 게임에 등장할 몬스터 캐릭터와 보조 캐릭터, 무기를 디자인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모니터 옆에는 작업 중인 도끼 밑그림들이 7~8장 붙어 있다.

“이르면 올 연말로 예정된 온라인 게임 출시를 앞두고 게임 캐릭터 개발이 한창이에요. 잡담을 나눌 틈도 없습니다.”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6시30분까지가 근무시간이지만 야근을 자주 한다. 바쁠 땐 2~3일씩 철야 작업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씨의 얼굴은 밝다. 가슴에 품었던 꿈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 국내 게임 포털 순위 4위인 이 업체 취직에 성공했을 때 연봉 2000만원과 주 5일 근무, 4대 보험 보장, 상여금보다 그를 설레게 만든 것은 정규직 직장의 안정성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

“많은 연봉은 아니지만 저는 만족해요. 제가 하고 싶었던 일에 ‘올인’할 수 있는 환경이니까요. 지난 6년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이런 작업실에서 일한다는 것만으로도….”

김씨는 인문계 고교 3학년 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반을 선택했다. 가정 형편도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는 고교 1학년 때부터 꾸어 온 만화가의 꿈을 빨리 이루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하루만 등교하고 나머지 시간은 위탁교육기관에서 그림과 씨름했다. 컴퓨터 그래픽 운용기능사 자격증도 땄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곧바로 명지대 사회교육원 만화예술창작학과(2년 과정)에 들어갔다. 친구들과 연락도 끊고 하루 7시간씩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지하철 승강장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크로키(움직이는 사람을 빠르게 그리는 것)하는 연습을 많이 했어요. 짧은 시간 안에 모델의 특징을 파악하는 연습이 게임 캐릭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교육원 등록금을 벌기 위해 비정규직 일자리를 옮겨 다녔다. 캐리커처 작가와 홈페이지 스킨 제작, 호프집·이삿짐센터 아르바이트…. ‘고졸’의 설움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교육원을 수료한 지난해 2월, 그는 만화가의 꿈부터 접어야 했다. 대여점, 인터넷 불법 복제 등으로 국내 출판만화 시장은 붕괴 직전이었다. 고심 끝에 게임 캐릭터 디자이너로 진로를 바꿨다. 내로라하는 게임업체들에 원서를 넣었으나 결과는 ‘완패’였다.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만화·게임 관련학과 대학 졸업자들을 제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일까.

“솔직히 당황스러웠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그림 하나만 보고 정말 열심히 달려왔거든요. 대졸자 친구들보다 열정이 모자라거나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면접 기회도 안 주어지니까 허탈하더군요.”

김씨는 좌절하지 않고 대신 고졸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 온 힘을 쏟기로 했다. 평면적·회화적인 요소가 강한 기존 캐릭터들과 달리 선이 중심이 되는 그림체를 개발한 것이다. 캐릭터의 특징적인 부분은 과감하게 부각시키고, 부수적인 부분은 생략했다. 고교 시절부터 그려온 만화의 특징들을 게임 캐릭터에 접목시켰다.

“실력으로 승부해 보겠다”는 각오로 게임 관련 채용 사이트에 공개 이력서를 올렸다.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15쪽의 포트폴리오와 함께. 그러나 그의 휴대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그에게 채용 제의가 들어온 것은 2개월이 지나서였다. 개성적인 그림체를 눈여겨본 M게임의 개발자가 김씨를 선발한 것이다.

“전문직이라면 학교 졸업장보다는 능력 보고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뭔가 뒤바뀐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운이 좋아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됐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도 많거든요. 정말 안타깝죠.”

매주 김씨의 태블릿 펜 끝에서는 게임 매니어들을 웃기고 울릴 몬스터들이 탄생한다. 북미 시장으로 진출해 외국계 게임 업체들과 일해 보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출퇴근 시간마다 그의 귀에는 영어 공부를 위한 이어폰이 꽂혀 있다.

“지금부터 시작이란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할 겁니다. 실력만으로 성공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모니터만 환하게 빛나는 작업실, 오늘도 김씨는 한 마리의 몬스터를 위해 밤을 새운다.


● 내가 본 김주현 -회사 간부 신명원씨
캐릭터 디자인 분야에선 단순히 잘 그리거나 멋있게 그리는 것보다 캐릭터의 아이덴티티를 살려내는 게 중요하다. 주현씨는 캐릭터의 성격과 특징을 잡아내는 감이 뛰어나다. 캐릭터의 어떤 부분을 강조하면 개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 원화를 그리는 단계부터 3D로 만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관한 고민을 한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 게임 제작은 업무상 긴밀하게 협의할 부분이 많은데, 주현씨는 사교성이 뛰어나 다른 팀원들과 손발을 잘 맞춰 나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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