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가뭄 … 상장사들 사옥까지 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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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가계도 사정이 어려워지면 여기저기서 돈 끌어 쓰다 결국 집을 팔지 않나. 기업도 마찬가지다.”

최근 회사 건물을 매각한 한 기업 자금 담당자의 말이다. 경기가 워낙 나빠 신규 대출은 엄두도 내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기존 대출의 만기를 연장만 해도 회사에서 잘했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덧붙였다.


돈 가뭄에 시달리는 기업들이 사옥·공장을 팔아 빚을 갚거나 운영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늘고 있다. 이달 들어서만 5곳의 상장사가 사옥·공장을 팔았다. 국내외 경기 둔화로 장사가 안 되는 데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사가 돈줄을 바짝 죄고 있어서다.

산업용 보일러를 만드는 동보중공업은 이달 초 경기도 오산의 공장과 직원 기숙사로 쓰던 아파트, 서울 금천구 가산동의 사무소를 한꺼번에 팔았다. 모두 합쳐 85여억원을 받았다. 회사 측은 월 2000여만원을 내고 기존에 쓰던 시설에 세를 들었다. 의류업체인 네티션닷컴은 올해 초 서울 송파구 오금동의 본관 사옥을 155억원에 판 데 이어 이달엔 별관 사옥도 같은 값에 매각했다. 회사 관계자는 “은행 차입금 상환과 운영자금 등에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의류업체 인디에프는 최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사옥을 1000억원에 팔았다. 회사 관계자는 “물류센터가 있던 경기도 용인으로 옮길 생각”이라고 말했다. 동원수산은 입주해 있던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건물·토지 지분을 165억원에 팔았고, 대양제지공업은 주로 창고로 쓰던 경기도 안산의 건물·토지를 106억여원에 넘겼다.

사옥·공장을 매각한 업체 대부분은 “당장 자금난이 심각해 자산을 판 것은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아직까지 견딜 만한 기업도 영업에 필수적이지 않은 자산의 매각을 서두르는 분위기다. 금리 부담이 커진 게 가장 큰 이유다.

한 업체 관계자는 “과거엔 공장 담보나 대표이사 신용대출로 운영자금을 마련했는데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며 “은행 직원이 ‘위에서 대출을 줄이라고 한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부동산 값 하락도 매각을 서두르는 이유다. 다른 업체 관계자는 “지금 파는 게 그래도 제값을 받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우증권 정근해 선임연구원은 “신용 경색과 부동산 경기 둔화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기업이 비핵심 자산을 팔아 유동성을 확보하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내다 팔 자산도 마땅치 않은 업체들이다.

하나대투증권 박시영 연구위원은 “돈이 꼭 필요한 업체일수록 자금 조달이 더 어려워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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